아이와 나, 세상, 그리고 내 일터
1.
결국 어린이집 할로윈 행사는 이른 아침 취소되었고, 내심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어려서 그런지 그렇게 섭섭해하지는 않았다. 어린이집에서 준비했던 사탕은 뭐, 준비된 것이라 그랬는지 가정으로 보내주었고 아이는 그걸 언제 먹을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저녁밥을 하다가 급똥이 마려워 화장실에 앉았는데 밖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났다. 거실인지 주방인지 모르겠다. 뜨거운 후라이팬이 생각나 서둘러 아이를 불렀다. 기어다닐 때도 엄마 화장실에 쫒아오지 않는 아이였는데 하는 수 없이 불러다 무릎에 앉혔다. 아이는 배가 아프다는 엄마에게 약손을 해주며 내가 낫게 해줄께. 라고 말하거나, 똥을 잘 싸려면 야채를 많이 먹어야 하는데 엄마는 먹었냐며 혼을 내기도 했다. 브로콜리당근양파무가지파배추콩나물을 많이 먹어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다 내가 했던 말이다) 똥은 어떤 똥 쌌냐고 바나나똥 쌌는지 새똥 쌌는지 물어봤다. (절대보여줄수없다) 자기는 이제 큰 변기에서 똥도 싸고 쉬야도 한다며 이제 어린이냐고 물었다. (기저귀를 떼야 어린이지) 할로윈 사탕을 얼만큼 먹으면 배가 아픈지도 궁금해했다. 항문기 아이에게 화장실은 최고의 놀이터였다. 아이랑 웃다보니 잠시 잊었다. 그렇게 일상을 찾는 듯 했다.
2.
이태원 참사 이틀 뒤, 센터에서 음악치료 세션이 있었다. 사람들은 뉴스를 보았다며 젊은이들이 그렇게 아깝게 죽어서 어떡하냐 안타까워하였다. 한 내담자는 그런 사고가 나고, 오늘 또 음악치료를 하지 못할까봐 걱정했다고 했다. 음악치료는 감정을 다루기 때문에 슬픈 감정도 나누며 덜어낼 필요가 있다고 안심을 시켰다. 실은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다. 코로나19로 인한 펜더믹 때문에 2021년 한 해는 아예 할 수 없었고, 올해도 겨우 시작했던 터였다. 그래서 우리는, 섣불리 다음 시간에 만나요란 약속을 할 수 없었다. 갑자기 중단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해두고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즐겁게 만나자 하였다. 그들은 올해 마무리를 앞두고 그런 경험을 토대로 중단에 대한 걱정이 되었을 것이다.
3.
서울은 생각보다 평안해 보였다. 가끔 길에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정치인의 플랜카드가 보였다. 세월호가 떠올랐지만 그때보단 사람들은 훨씬 성숙해진 것 같았다. 스스로를 정화하고, 소모적인 싸움을 거는 것을 자제하였다. 애도해야 할 대상을 정확하게 알았고, 매의 눈으로 지적하고 고쳐야 할 대상도 뚜렷했다. 언론이 잘못 보도하면 꾸짖고, 정치인의 태도가 상황과 맞지 않으면 당장에 비판하였다. (이게 나라냐 증말) 주위 사람들은 상처가 되는 말들을 조심했다. 그만큼 정치인들도 눈치가 빨라졌는지 불리한 증거들이 나오자 바로 사과를 하였다. 참 이걸 좋아진 거라고 해야 할지.
가장 눈을 사로잡는 뉴스는 이거였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예전과 달리 질서를 지키고, 조금씩 거리두기를 하면서 간다는 뉴스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같이 출퇴근을 정할 수 있는 사람들은 시간을 피해서 간다지만 정시에 출퇴근 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에서 내 몸을 던져야 하지 않나. 뉴스에 안정을 찾는 동작을 소개하거나 신경과의사협회 등에서 낸 성명서, 현장에서 힘써준 여러 영웅들에 대한 기사에서 서로를 연대하며 지난 날보다 단단해진 우리의 마음상태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공연이 많이 취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럴 때일 수록 정서적 정화를 해주어야 할 텐데. 공연자(단체) 스스로 판단하여 정한게 아니라 국공립은 그런 지침이 내려왔다고 한다. 아마도 그들은 최대한 방어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세월호 부터 시작해서 팬더믹까지 얼마나 많은 공연예술 종사자들이 속앓이를 하고 있을지 씁쓸하다. 공연이 모두 신나고 즐거움만 추구하는 건 아닐진대. 이미 사람들의 의식은 성숙되었는데 시민의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관료들이란!
4.
어제는 아이와 동네 약국에 갔다. 온전히 내 약을 사기 위해서였다. 한달째 아이에게 옮은 감기가 완전히 낫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은 몸살인가 싶었고, 나았나 했을때 콧물이 주루룩 흘렀다. 콧물이 멈출 무렵 목이 찢어질듯 아팠다. 그게 아마도 빵공장 사고때부터 시름시름 앓았던거 같다. 정신적 고통의 신체화, 면역력이 한참 떨어졌다. 다 먹은 영양제 칼마디아와 목을 좀 낫게 하려고 소염제를 찾았다.
약사 선생님은 소염제보다 다른걸 추천해 주셨는데 무슨 한약재로 만든 물약이었다. 약국에서 한약이라니, 예전에도 한번 크게 두통이 왔을 때도 약사들이 만든 두통약이라며 추천해 준 적이 있었다. 의아해하며 먹었는데 먹자마자 두통이 사라져 놀랐었다. 이번에도 믿어보마 하고 먹었는데 목 통증이 싹 사라짐! 명약사로세! 주위에 이런 믿을만한 전문가가 있다는게 참 든든하다. 이렇게 일상을 찾는 듯 했다.
5.
아침에 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그제 음악치료 한 그룹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단다. 그날도 기침을 걸죽하게 하셔서 방으로 돌려보낼까 고민했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그냥 두었었다. 그 분의 이름을 듣는 순간 쿵 하고 무너졌다. 그날 돌려보낼껄. 물론 모두 마스크를 하고 다른 분들은 다 음성이 떴지만, 권한이 있었던 사람으로서 괴롭다. 괴롭다. 코로나가.. 아직 안 끝났었지. 잠시 다음 시간을 기약했던 느슨했던 내가 또 용서가 안된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