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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수정 Mar 27. 2023

연의 비행, 산조의 성음놀음

박경소, 김죽파류 가야금산조

돈화문국악당에서 2023 산조대전이 열리고 있다. 3주에 걸쳐서 20대부터 각 세대(및 지역)를 대표하는 연주자들이 각각의 산조를 연주한다. 기획 취지에 맞게 이 공연은 경쟁구도가 아닌 산조의 개성과 품위를 드러내는 축제의 장이었다. 나는 3월 16일, 이제 꽃다운 나이 42세가 되었다는 박경소의 김죽파류 가야금산조를 듣고 왔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나와 그녀의 역사를 풀어 놓을 필요가 있다. 그녀는 나의 하늘같은 선배였고 대학시절 종종 복학생 오빠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가야금 잘 하는 언니였다. 그런 이와 마주하게 된 건 2007년즈음 타루 작곡 워크샵이었다. 마지막 과제로 실연을 하는데 황송하게도 타루에서 덜컹 가야금연주자 그녀를 섭외한 것이다.


이후 한동안 아우라 언니였던 그녀와 다시 조우하게 된건 2011년 초 진도, 그리고 2011-2012오스트리아 크램스였다. 오스트리아 맴버들과 한국의 아티스트 넷이 ‘마크로포니아’란 이름으로 유럽투어를 계획하게 되었고, 그 전에 감사하게도 박경소(언니)와 내가 크램스 레지던시에 초청 받았다. 그렇게 우린 룸메이트가 되었다.


우리가 하게 된 음악은 그림(악보) 및 사진에 영감을 받아 정교하게 계산된 즉흥음악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가야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순간의 프레이즈를 경계없이 끌어당기는 그녀를 보고 머리털이 쭈볏 섰다. 그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 창작 및 즉흥음악에 관해 이미 통달한 선인이었다.


그런데 이런 경계의 자유로움을 넘나드는 그녀의 근본이 산조였음을 나는 알아챘다. 2013년 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연주된 그녀의 김죽파류 가야금산조에서 말이다.


첫 음을 내는 다스름에서 소리로 우주가 잠시 구겨졌다 팽창되는 환상을 보았다. 음과 음 사이 왼손으로 시간을 당겼다 놓았다 다시 감아 후리는 그 모양새가 마치 3D우주 어딘가 놓여진 징검다리를 폴짝 뛰어다닌 기분이었다. 아! 여기에서 그런 입체적인 즉흥이 나왔구나. 산조는 그녀 음악 기저에 내재된 본향(本鄕)이었다.


2023년, 그때로부터 꼭 10년 된 오늘의 연주에서 사실 그걸 기대하고 왔다. 내가 좋아하는 다스름을 듣지 못해 투정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녀는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40분 밖에 안 하는데 무슨 다스름을 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런 섭섭함은 실은 진양의 ‘싸랭’으로 모두 녹았다.


다소 낮게(또는 헐렁하게) 조율된 가야금은 2013년의 팽팽함과는 또 다른 질감을 가졌다. 줄을 눌렀다 내는 왼손의 움직임이 세세하게 소리로 다가왔다. 여기서 나는 어린시절 연날리기가 생각났다. 문득 글로 남기고 싶어져 서둘러 적어본다.


내 세대에서도 누가 연날리기를 실제로 해봤겠냐만은 내가 시골 촌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겨울이 되면 큰아버지는 제법 마른 대나무를 쪼개 연살을 만들었다. 얇게 다듬은 살을 맞대어 실로 칭칭 감은 뒤 초를 녹여내어 고정 시켰다. 그 다음 창호지를 발라 연의 모양을 잡은 다음 산과 태극을 그렸다. 그리고 색칠하는 것이다. 이 가장 중요한 임무는 내게 맡겨졌다. 색칠을 꼼꼼히 하기에 나는 적합한 나이었고, 동생은 너무 어렸으며 이미 머리가 큰 사촌 언니오빠들은 이 임무를 하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색칠이 끝나면 아랫목에서 하룻동안 말렸다가 연줄을 대어 머리는 팽팽하게 잡아채고 양쪽의 균형을 잡는다. 키만한 방패연이 완성이다.


바람이 적당히 거칠게 부는 대보름날이 되면 연을 띄운다. 논바닥에 바람의 방향을 보고 방패연을 세워두고 줄을 풀어 거리를 둔 뒤 달린다. 연이 뜨기 시작한다. 그러면 한 손에 얼레를 다른 손에 연줄을 쥐고 당겼다 풀었다 하며 연을 높이 올린다. 마치 진양의 선율처럼 줄을 쥐락펴락 하며 산조를 궤도에 올려놓는 것이다. 연을 올릴 때는 한 음 한 음 공을 들인다. 자칫 잘못하면 추락하거나 엉킬 수도 있다. 줄을 잡은 손은 미세한 흔들림으로 풍향과 풍력이 느껴진다. 바람이 세면 당겨지고 그럼 연줄을 좀 풀어야 한다. 바람과 손은 연줄로 연결되어 있다. 바람의 방향을 잘 보아가며 연이 그 흐름을 타 하늘을 오를 수 있도록 당겼다 푼다.


이윽고 연줄이 안전하게 당겨지는 때가 온다. 그러면 큰아버지는 잡은 연줄을 10살의 내게 쥐어준다. 마치 산조를 배울 때 처음으로 배우는 악장이 중모리인 것처럼.  그녀의 중모리는 덤덤하지만 단단하게 연주된다. 그러면 나도 용기를 내어 12박 즈음에 추임새를 넣어본다.


이제 연을 단단하게 띄웠으니 걸지게 놀아볼 차례이다. 연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빙글빙글 돌았다가 겅중 뛴다. 연이 궤도에 오르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숙련자의 놀이이다. 다시 연줄을 잡아 쥔 큰아버지는 한 손으로 줄을 당겼다가 풀다가 다른 손으로 얼레를 풀었다가 감았다 바쁘다. 큰아빠의 뒷모습은 마치 중중모리 자진모리장단에 어깨를 들썩이며 균형을 잡는 줄광대 같았다.  


바람이 휘 몰아치면 얼레의 줄은 빠르게 풀리고 손도 바쁘다. 그런데 모순처럼 연은 하늘 위에 고요히 떠 있다. 저 하늘 위에서 평화를 찾은 것 마냥. 그러면 이제 서서히 놓아줄 때가 된다. 한껏 풀어진 얼레는 다시 나의 손에 쥐어지고 큰아버지는 바람을 보다 호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 연줄을 끊는다. 연은 바람을 타고 휘리릭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쉬움 보다는 후련함이 더 크다. 이 판에서 잘 놀았으니 연은 미련 없이 잘 간다.

박경소의 산조를 들었을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쉬움보다는 후련하다는 감정이 들었는데, 씻김을 받는 듯 했다. 마치 액운을 가지고 멀리 달아나는 연 처럼 말이다.


2023 산조대전의 주제가 ‘성음(聲音)’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무대는 주제에 아주 딱 드러맞지 않나 생각이 든다.

산조는 흔히 ‘성음놀음’이라고 하고, 미학적으로 ‘음양의 대비’, ‘문답’, ‘기경결해’의 음악이라 한다. 이걸 실제 음악으로 구현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다양하고도 적절한 농현의 구사, 정확한 악조 해석과 시김새 구분, 음향의 다이나믹, 대비되는 가락, 장단의 내고 맺음에 대한 선율적 이해 등이 있을 것이다.

오늘 성음에 관해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바로 악조의 변화를 악보가 아닌 귀로 알아들은 것이다. 실은 내가 가야금 산조를 아무리 들어도 도통 다 계면조 같아 이해하지 못했던 막귀이다.

그런데 그녀는 계면에 맞는 농현, 경드름에 맞는 앙증맞은 선율, 평조에 걸맞는 음색을 적재적소에 표현했다. 이건 내 귀가 트였다기보다 연주자가 악조의 변화를 정확히 인지하고 입체적으로 구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우주에서 음을 완성해가고 있음(成音)을 귀로 알았다.

불혹에 접어든 박경소의 산조는 팽팽하고 날 선 산조라기보다 유연하고 깊이가 있었다. 조율때문인지 몰라도 줄의 소리 뿐만아니라 나무의 울림이 더 깊게 느껴지고, 멀리 앉아 있었음에도 왼손으로 만드는 음들이 가깝게 들린다.

한 음을 정성스럽게 보듬어 만들고도, 어쩔 수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는 음들은 미련없이 흘려 보냈다. 여기서 그녀의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느껴진다.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뭐 어쩌겠어”) 예술적 삑사리(Artistic deviation)는 실수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변명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오르기 전 무대에 놓인 두 개의 방석에 울컥 했다. 컨디션이 걱정된 것이다. 변명할 기회가 여러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첫 장단을 듣고 너무 좋아서 눈물이 쏙 들어가버렸다.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산조는 불안감이 없었다. 대보름날 어둑해지는 하늘 위 청초하게 떠 있는 연과 같았다. 제법 센 바람을 견딜 수 있는 탄탄한 방패연. 연 줄이 끊겨 우주도 날아가도 “재미있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신나게 우주여행을 할 것만 같은 연(鳶). 룸메였을때 종종 얘기해주던 죽파할머니를 룰루랄라 만나러 갈 것 같은 멋진 연(鳶).


#2023산조대전 #박경소 #김죽파류 #가야금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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