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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수정 May 04. 2023

엄마의 시간을 걷는다



오늘은 컴퓨터도  켜고 아무것도  할테다. “


이렇게 다짐을 한 날이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까페로 향했다. 나오는 길에 음식물 쓰레기나 버려야겠다 싶어서 대롱대롱 들고 나왔다. 다 소진한 참기름병도 갖고 나왔다. 음쓰 버리는데 세상에! 참기름이 나의 손 어딘가에 묻은 것이다. 아, 젠장. 깊고도 진한 참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할머니가 농사짓고 고이고이 짜내어 외손녀에게 보내준, 이제는 찌꺼기만 남은 그 참기름 냄새가 온 몸을 휘감았다.


길을 나서는데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다. 까페에서 메뉴를 시킬 때에도 점원이 코를 찡끗 냄새를 맡은 것 같다. 나의 계획이 틀어지고 있었다. 오늘 만큼은 힙하게 있고 싶었는데.


언젠가 아이가 있는 친구를 만났을 때, 그녀 역시 지금의 나처럼 헐레벌떡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온 터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설렘에 얼굴이 상기되었고, 나름 차려입은 옷소매에는 밥풀이 묻어 있었다. 그렇게 멋쟁이던 네가 아이를 건사하느라 정신 없구나.


어릴 때 우리 엄마는 나를 공주처럼 입히느라 자신은 후줄근하게 다니는 모습이 싫었다. 에휴 엄마도 좀 예쁜 옷 좀 입지. 그런데 그 모습이 돈이 없어서도, 꾸밀 줄 몰라서도 아니었다. 네 살 딸을 데리고 외출하는 나의 모습이 지금 꼭 그렇다. 아이는 공주 옷에 머리를 단정히 묶고 반짝 빛나는 구두를 신고 가면 나는 시녀처럼 아이의 간식 손수건 여벌 옷 물티슈 기저귀 등을 든 커다란 가방을 들고 헐레벌떡 쫒아 가는 것이다. 어떨 땐 눈꼽도 못 떼고, 헝크러진 머리를 감추기 위해 모자는 필수.


나의 모습에서 그때 엄마의 모습을 본다.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싫은 엄마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엄마도 그러고 싶어서 그렇게 입은 게 아니란 걸 이제 안다. 시간이, 인생이 이렇게 간다. 엄마가 되지 않았으면 모를 그 시간. 내가 이렇게 엄마의 시간을 따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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