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나 소나 책을 쓰냐
지난 7월 내가 모든 sns와 뉴스를 끊으며 한문 공부에 몰두했던 시간이 있었다. 논문자격시험을 위한 공부였다. 시간이 정말 촉박했고, 분량이 너무 많고, 어려웠다. 삼시세끼 밥을 지으며 공부에 몰입하기 위해 세상(?)과 연을 끊었다. 이번에 안 되면 할 수 없지 5주 공부해서 되겠냐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그래도 재미있게 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야기의 힘이었다. 더듬더듬 네이버한자사전에 써가며 한 주제가 하루종일 걸려도 또 보고 싶었던 이유는 시험 범위가 논어맹자중융대학과 같은 경서에서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실록 경국대전 상소문 문집 등의 역사와 문학, 중국 문집의 명문장들 등을 원문 그대로 본다는 것이 가슴뛰게 만들었다.
세상은 바뀌었고 관계도 바뀌었지만 달라지지 않은 게 하나 있었다. 바로 2000년 전 사람들도 현대인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군주가 지 멋대로 하는 것에 빡치고, 내 최애 꽃을 볼때 행복하며, 친구들과 산수 좋은데 가서 놀고 먹는 것이 최고고, 잘하는 놈들 보면 부럽고, 아들 걱정에, 내 앞길 막막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중국 문장가들을 비롯하여 이제현, 성현, 정약용, 이황의 인간미가 느껴진다.
이런 마음을 표현한 글들은 어찌보면 산문, 지금의 에세이이다. 이들이 없었으면 맨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들만 난무한 채, 농사짓고 집을 짓는 등의 생활상과 관찰, 사람의 감정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문장가들은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해 고대민요를 담은 <시경(詩經)>을 남기기도 했다.
식자들만 했던 이런 글놀음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읽기에 옛날과 같은 제약은 사실 사라졌다 볼 수 있다. 글을 알고 책을 쓴다는 것 자체가 권력이었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 (물론 그 사유의 깊이가 다를 수는 있겠다. )
글쓰기 자체가 마음을 다스리는 한 방법이었던 것은 옛 성인들도 마찬가지이며 현대에서도 치료방법으로도 쓰인다. 직업도 삶의 형태도 다양해지면서 옛날보다는 훨씬 할 이야기도 생기고 새로운 이야기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 이야기를 읽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아직도 자신만이 진품(엘리트)이라 여기며 기저에 타인의 글 깊이를 따지는 어리석음, 아직도 지식이 권력인 양 지껄여 대는 오만한 태도, 출판은 특별한 지식인의 권리인 척 목이 뻣뻣한 자들이 있다. “에세이는 쓰레기다.”라고 말하는 그 뻔뻔함은 어디서 오는지.
그런 논리라면 피아노는 꼭 전공자만 쳐야하고, 가수는 실용음악과를 나와야하며, 작곡은 음악박사를 나와야 하는가? 과학기술분야는 워낙 특화되었다 치자. 그래도 예술에 한해서 소설가가 아니어도 글이 논리적인 사람이 있고, 전공자보다 민요를 잘 부르는 사람이 있고, 가수보다 노래 잘 부른 사람은 동네에 꼭 있으며 미대나온 사람보다 디자인에 감각이 있는 사람이 널렸다.
책을 만드는 나무가 아깝다면 걱정 마시라. 최재천 교수님 피셜 종이회사에서 심고 길러서 종이를 만든단다. 학문이 아닌 글쓰기, 문학이 아닌 에세이가 쓰레기라면 피드에 올라있는 비전공자의 어수룩한 피아노 영상은 소음인가.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어야하며, 노래를 부르고싶은 사람이 있다면 부를 수 있어야한다. 그리고 싶은 사람은 그리고, 두드리고 싶은 사람은 두드려야 한다. 그들은 나름의 무대에 설 수 있다. 예술은 도구로써 사용하면 그만일 뿐 예술 자체를 추앙할 필요 없다. 모든 인간은 예술로써 자신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예술은 그렇게 태어났다.
물론 그 글(책)이 온전히 유익하고도 고매한 문장으로만 이루어졌다 할 수는 없겠다. 내 책장에도 전직 교장선생님이나 정치가의 자서전이 꽂혀있고, 학위과정을 위해 휘뚜루마뚜루 쓴 논문들이 있다. 자신을 한없이 부풀리거나 홍보 등 다른 목적으로 책을 쓴 이들도 많다. 나 자신도 몇 권의 책을 썼지만 스스로 작가라 불리는 것은 낯간지럽다. 옛 문장들도 우리는 남은 명문장들만 보아서 그렇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글들이 수없이 불태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수준이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않는다고, 그들의 수고와 시간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냥 안 보면 되지.
내가 음악학 공부를 하면서 가장 처음 배운건 그 논문이 ‘신뢰할만한 것인가’ 였다. 물론 공부를 지속하면서 나에게도 구분할만한 눈이 트였다.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사람은 책을 쓰는 사람들이다. 책을 많이 읽기에 책을 쓰고 싶은 것이다. 굳이 그들의 욕망을 재단하는 작가는 자신의 미래 독자를 잃은 셈이다. 누구도 (자신이 읽지도 않은) 책을 짓는 행위에 대해 가치판단을 할 자격은 없다. 에세이가 많이 나온다고 지구가 망할만한 일인가? 그 중에 옥석을 가려낼줄 알면 그만이다.
인간의 삶이 계속되는 한 이야기도 계속된다. 민요에서 시로 가요로, 문집에서 판소리로, 에세이로, 영화로, 유투브로, 드라마로 매체만 달라질 뿐이다. 다듬어진 이야기도 있지만 거친 날것의 이야기도 있고, 때론 적당한 쓸모가 없을 수도 있다. 그 이야기를 귀담아듣느냐는 문제는 논외로, (앞으로도 진화할) 이야기를 담는 그릇에 대해 급을 나누는 것은 썩 배운 사람 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