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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수정 Aug 23. 2023

[bookreview]단명소녀투쟁기

현호정


왜 모험을 하며 자아를 찾아가는 여성 캐릭터는 없을까. 이런 궁금증을 여러번 가졌다. 항상 미성숙한 소년은 꿈과 모험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카프카가 그랬고, 햄릿이 그랬다. 이야기를 따라가며 주인공이 조력자인 여성에게 느끼는 감정은 오래된 소설일 수록 지극히 대상화되었다. 우연히 가벼운 키스나 접촉에 몸이 달아오르고, 주인공은 여러모로 각성하는 기회를 가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남자)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어려웠고, 이야기에 몰입이 자주 깨졌다. 그 이유가 성인지감수성과 연관되었단 사실을 미투운동 이후 깨닫게 되었다.


이해는 한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남성 소설가들은 경험하지 못한 (여성으로서) 세계를  그려낼 자신은 없으며, 보통 자신을 투영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우기 마련이다. 이것은 물론 여성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양적으로 남성이 주인공인 소설이 많았던 탓이다.


서론이 길었다. <단명소녀 투쟁기>를 읽고자 했던 이유는 바로 여성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인공이 나와 이름이 같은 ‘구수정’이다. 첫 문장이 “구수정이 스무 살 되기 전에 죽는다고 예언한 사람의 이름은 북두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김영하의 <작별인사>에서 느꼈던 어떤 문제의식을 전복시켜줄 책이라 확신했다. 이건 운명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여하튼 나(와 이름이) 같은 주인공 수정은 자신의 죽음 예언을 단호하게 걷어차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현실의 고3 소녀에서 북두의 예언을 듣고 무조건 남쪽으로 향하다 내일이라는 개를 타고 죽음과 삶의 경계를 경쾌하게 뛰어 넘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처지와 반대되는 (성별이 특정되지 않은) 이안을 만나 목적은 다르지만 같은 미션을 수행하는 동료가 된다.


이야기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다고들 하지만, 난 이 서사의 맥락이 어쩐지 익숙하다. 바로 신화를 내재한 본풀이에서 말이다. (본풀이는 서사무가라고도 한다) 바리공주의 모험기라 할 수 있는 바리데기는 동해안 별신굿을 비롯하여 서울 진오기굿,  함경 망묵굿 등에서 여러 버젼으로 존재한다. 굿은 배경과 시간을 넘나들며 여러 신들의 내력을 만신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재미난 것은 본풀이의 내력이 오래된 것일수록 여성의 서사가 더욱 예측불가라는 점이다. 신격을 배신하고 죽여버린다던지, 멍청한 남편을 만나 이승과 저승을 오가며 뒤치닥거리하는 청정각시랄지.


<단명소녀 투쟁기>는 그야말로 살기 위해 죽음과 투쟁하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실은 <북두칠성과  단명소년>을 비롯한 연명담을 그야말로 한껏 비틀어놓은 작품이라 한다. 주인공을 여성으로 비틀고, 운명을 거부하며, 진취적이고 투쟁하는 이야기틀로 갖추며 현재성을 갖게 되었다.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작가가 학문으로서 문학을 충실하게 구현한 작품이라 여겨진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오늘은 아니다.(21쪽)”


현실의 지하철 역에서 환상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그 장면은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를 정도로 몰입감이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지는 것이, 이 소설도 영화나 드라마같은 매체로 확장할 여지가 충분히 있어보인다.


다 읽은 뒤 복기해보니 이안은 죽고자 했던 수정의 다른 자아가 아닐까 상상해본다. 이안은 누군가 죽이려 했고, 죽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었는데, 현실에서 어제의수정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죽고자 했으나 실은 미친듯이 투쟁하고싶을 정도로 살고 싶은 이. 이안은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또 다른 시선(異眼)의 나라는 뜻으로 종종 읽힌다. 내일이라는 개의 이름도 참 잘 지었단 생각.

술술 잘 읽히는 편이나, 좀 더 촘촘한 플롯이 있으면 어떨까 죽음에 대한 고민이 더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렇다면 곱씹어보는 재미가 더했을 것 같다. 청량감은 떨어지려나.


표지의 ‘구수정’은 현실의 나와 사뭇 다른 당찬 눈빛의 소녀다. 누군가의 리뷰에서 삶을 계속해서 아홉번 고쳐(수정해)가며 내 의지대로 살아가고픈 욕망을 담은 작명이라 했다. 지금까지 내 이름은 촌스럽고 맘에 들지 않는 이름이었으나 이 소녀의 당찬 모습에 힘입어 용기를 좀 얻었달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두 번 정도 죽었다 살아난 것 같다.



#박지리문학상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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