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뉴욕 고양이, 그리고 달

NYC, USA

by 구수정




그렇다. 떠나고 싶어 떠났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다시 돌아오고 싶게 만드는 것은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다시 짐을 꾸려 36번가 도미토리 숙소로 이동하고서 같이 수업을 듣던 친구를 만나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는,센트럴 파크 잔디밭에서 널브러져 몇 시간 동안 잤다.
그동안의 피로가 몰려왔다.
다시 외로워졌다.

주말 동안 내내 곰처럼 잠만 자다가, 이러면 안 되지 싶었다. 내가 지내는 이 하루하루가 돈인데. 이 한 몸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그래 여긴 뉴욕이야.
월요일이 되는 날 아침 학교를 찾아갔다. 학기가 끝난 강의실 303에는 우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의 목적, 인터넷을 하기 위해 컴퓨터실로 직행. 앞으로 약 2주간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보고 싶었던 뮤지컬 리스트를 만들고, 박물관 지도, 그리고 축제, 나이아가라

그런데, 그를 만났다.

"수정, 여기서 뭐하는 거야?"
"아.. 안녕.. 리오. 나 뉴욕 투어 계획 세워 ㅎ_ㅎ"
"그래? 난 연습하러 왔어.."
"그래 반가워, 연습 잘해~!"

그는 첼로를 등에 메고 연습실로 사라졌고, 나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기에 열심히 웹서핑을 하고 있는데,

"수정..."
"으응?"
"너 오늘 저녁 시간 있으면 나랑 저녁 먹을래?"

그가 다시 와 내게 물었다.

"그럴까?"

난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안 그러면 혼자 먹어야 했으니까.

"그럼 6시에 이 건물 앞에서 만나."
"그래 좋아.!!"

그는 일본, 러시안 혼혈 미국인이었다. 부리부리 찐하게 생긴 쌍꺼풀에 높은 콧대, 새카만 머리. 그는 첼리스트다. 줄리어드를 졸업했고, 지금 NYU에서 석사과정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공연 때 나를 도와주어 그때 친분을 쌓게 되었다. 즉흥연주도 잘 맞았고, 너무 좋았다며 다음을 기약하기도 했다. 그는 한참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 나를 느긋하게 기다려주면서, 말했다. 자기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그랬다며.

우리는 재팬타운에 있는 퓨전 음식집에 갔다. 그가 자주 가는 곳이라며 이 음식들이 자기 처지와 같단다. 그의 추천으로 몇 가지 음식을 시키고는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곧 협연이 있다고 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음악들을 MP3로 들려주며 주로 음악 얘기를 했다. 그도 한국의 예술가들과 다를 바 없이 클래식도 하지만 뮤지컬 음악도 하고, 심지어 힙합까지.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그가 말했다.

"너 우리 고모집에 있는 고양이 보러 가지 않을래?"

고모가 여행을 떠나서 고모가 키우는 고양이 밥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조금 늦은 시간이어서 고민되었다.
이런 나를 눈치챈 듯, 그는 나를 안심시켰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고. 고모네 집은 링컨센터 근처에 정말 오래된 아파트여서 한번 보여주고 싶다고. 고양이 올리버도 너를 좋아할 거라고.
어렵사리 승낙을 했다. 올리버도 보고 싶고.

오.... 역시, 고모의 아파트는 정말 고급스럽고 럭셔리한 아파트였다. 한국의 아파트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성 같다고나 할까.
보안도 철저했다. 번호를 누르고 철문을 지나자 빨간 카펫이 깔려 있었다. 높은 천장의 건물은 대리석으로 되어있었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걸려있다. 엘리베이터 역시 오래되어 보이긴 했으나 기품이 있었다.

"이런 데가 있다니....."

눈이 휘둥그레진 나의 모습을 보더니 그는 만족한 듯 크게 웃으며 이것저것 설명을 해준다. 고층에 자리 잡은 그의 집은 커다란 열쇠를 열고 들어가니 집 안에 복도가 또 있다.
역시 오래된 카펫, 오래된 가구 냄새, 벽에 걸린 리오의 고모부 초상화, 센트럴 파크가 훤히 내다보이는 전망. 무슨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 곳. 거실엔 100살은 돼 보이는, 아주 오래된 갈색 그랜드 스타인웨이가 있었다.

"맙소사, 고모가 피아니스트야?"
"아니.. 그냥 갖고 있는 거야."
"우와 대단해!"

이 낯선 공간에서 느껴지는 희한한 편안함, 그리고 낯선 이와 함께 있다는 두근거림.

그때, 복도 끝에서 올리버 녀석이 나타났다. 회색에 날씬한 몸을 가진 러시안블루. 처음에 경계하더니 거실에 역시 오래된 소파에 앉아있는 우리에게로 슬그머니 다가온다.

리오는 어디선가 통조림 캔을 가져오더니 그릇에 담아 올리버에게 주었다. 얌냠 맛있게도 먹는다. 리오는 올리버를 들어 올려 나의 품에 안겨주었다. 조그만 게 부드러운 촉감과 뜨끈한 생명의 느낌. 나는 왠지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뭔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냐아옹!!"

순간, 올리버가 뛰어올라 나의 팔에 생채기를 내고는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으으으.... 녀석은 낭만에 빠진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말이다.

'그렇지!! 이런 곳에 겁도 없이 쫒아온 내가 정말 미쳤지.'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 공간도, 같이 있는 리오도. 빨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온갖 나쁜 상상이 들었다. 한국 여성 원정 성매매부터... 이놈이 날 그렇게 보는 건 아니겠지? 이곳에서 나가는 방법도 모르는데 만약 무서운 일이 벌어지면 어쩌지?

그때, 나에게 생채기를 내고 미안한 듯 올리버 녀석이 피아노 위에 올라가 근사한 노래 한 곡을 연주한다. 온갖 나쁜 상상에 낯빛이 어두워졌던 나, 올리버가 상처를 낸 게 미안한 리오. 우리 둘은 올리버 녀석의 재롱에 그만 빵 터지고 말았다. 올리버, 한두 번 한 솜씨가 아니야.

"하하하하... 근데 나 올리버 사진 찍어도 돼?"
"뭐라고? 으하하하하"

난 그 순간 무슨 정신이었는지, 여행자의 철저한 기록 욕구에서였는지, 정신 나간 소리를 했다. 리오는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으하하하 당연히 되지, 왜 안 되겠어!!"


녀석은 나에게 베스트 샷을 선물하고는 슝 사라져버렸다.

"리오. 난 이제 가야겠다."
"내가 데려다줄게"

링컨센터 근처에서 36번가까지, 쭉 직진해서 내려오면 되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맨해튼 고층빌딩 사이로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커다란 보름달이 우리를 따라나선다. 같이 걷자고 말이다. 맨해튼 밤거리가 위험하다고 여행책에 쓰여있었는데..

"우와 달 진짜 크다."
"나도 뉴욕 살면서 저런 달 처음 봐."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한참을 걸었다.
아니, 말이 필요 없었다.
이 기분을 계속 느끼면 되니까.

아까 한 엉뚱한 상상에 혼자 웃음이 났다.
두근두근... 낯선 이와의 동행. 모든 게 끝난 후, 몸도 마음도 넉다운이 되어 정작 여행할 기운을 잃었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는데. 이렇게 예상치 못한 저녁식사, 그리고 뉴욕 고양이와의 만남이 나를 다시 일깨워 주는구나.

'여기 뉴욕, 아직 할게 많다고.'

누군가 나에게 잠시 잊어버린 비밀을 상기시키려는 듯, 뉴욕 맨해튼 빌딩 숲 사이로 시원하고도 경쾌한 바람이 우리를 휘감았다. 난 또 주책 맞게 또 다른 로맨스를 꿈꾼다. 낭만의 뉴욕 밤거리.

"남은 날도 좋은 여행이 되길.."

숙소에 다다르자 리오는 나의 이마에 작별의 키스를 해주고는 내가 들어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준다.
마천루 사이 보름달, 낮보다 환한 밤이다.






@2008 Newyork city, USA



*첫 이미지는 gogle에서 퍼왔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