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dona, USA /Jeju, KOREA /Edinburgh, SCO
scene 1. 2012년 세도나
미국 중부 칼리코에서 세도나 가는 길.
한국에서는 잘 안 하는 운전을 미국에서는 해야 할 때가 있다. 하루 종일 운전해도 먼 길을 혼자서는 벅차기 때문이다. 서부 사막만 달리다가 볼텍스가 퐁퐁 솟아나온다는 세도나 가는 길엔 산이 많았다. 그것도 스케일이 어마어마한 산.
해가 어스름 지고 있었다. 얼른 예약해둔 호텔로 가야 했다. 오르고 올라가 지대가 높은 줄로만 알았는데 내비게이션을 보니 고불고불 길이 눈에 들어왔다. 이럴 수가. 설마 내리막길? 첩첩산중에 구비구비.
문경새재 저리 가라 하는 코브라 백 마리 길. 오른쪽으로 돌자마자 왼쪽으로 돌아 다시 오른쪽, 왼쪽 180도 유턴 길. 이건 소문자 s가 줄줄이 이어진 길. 초보운전자인 나는 등줄기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엑셀과 브레이크를 오가는 오른발은 이미 마비상태다. 중간에 멈추어 운전자를 바꿀 틈도 없었더랬다. 30여분을 그렇게 운전하며 내려와 드디어 평지에 내려오는 순간, 작은 산짐승이 도로로 뛰쳐나왔다.
"로...... 로드... 킬.....?"
scene 2. 2009년 9월 제주도
제주 올레길 1코스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실은 1코스 가던 길에 성산 일출봉에 한눈이 팔려 완주는 못하고 성산일출봉을 올라갔더랬지. 시원한 바닷바람과 탁 트인 제주의 풍경을 보면서 아, 오르길 잘했구나. 싶었다. 그렇게 신나게 트래킹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숙소인 제주시로 돌아오기 위해 버스를 기다렸다. 날은 어둑어둑 해지고 다리는 아프고, 결국 택시를 타기로 결정. 우리 네 명은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아 택시 타길 잘했어!!"
서로 흐뭇해하며 우린 택시 안에서 화기애애해졌다.
"올레길 다녀오신 모양이에요?"
택시기사 아저씨는 제주도 토박이로 꽤 재미있는 분이셨다. 제주도에 대한 애착도 남다르셔서 좋은 이야기도 해주셨다. 마침 내일 자유시간이었기 때문에 우린 이것저것 여쭈어 보았다.
"아저씨!! 저희 하루에 갈 수 있는 좋은 곳이 어디 있을까요?"
"여기 제주도야 다 좋죠~ 올레길 다른 코스 가도 되고.. 내가 진짜 좋은 곳 알려줄까? 난 다랑쉬오름이 그렇게 좋더라고."
"우와 진짜 다랑쉬라는 데가 있구나. 거기 한 번가 볼까?"
"다랑쉬오름이 자연보존도 너무 잘되어 있고 말이지. 잘 안 알려져서 사람도 많이 없고 너무 좋지. 다른 거는... 뭐 젊은 애들은 오토바이 빌려서 일주도 많이 하던데. 저기 서쪽 해안 타고 다녀도 되고.."
" 이 택시 진짜 잘 탔다~ 또 어디가 좋아요?"
"한라산 이번에 돈내코 코스 열었는데 거기도 좋고..... 아!! 잠깐만!!!!!!!!
끼익~!!!!!!!!
아저씨는 깜깜한 길 한가운데 갑자기 차를 세웠다. 이건 무슨 일이지? 갑자기 우리 일행은 공포에 휩싸였다. 택시 아저씨는 차를 급히 세우자마자 헐레벌떡 밖으로 나가버렸다.
'헛.. 이거 말로만 듣던 택시 강도인가? 납치인가?'
택시 안에 덩그러니 우리만 남겨졌다. 오 마이 갓....
한참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고 오던 터라 어디까지 왔는지, 여긴 어디쯤인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왔던 길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길에는 가로등 하나 없이 깜깜했다. 방위를 잃은 나침반처럼 우리는 좌우로 일렁였다. 산속 같았다. 흉기를 든 강도 일행이 우리 택시를 에워쌀 것만 같았다. 나는 급하게 내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엎친데 덮친 격, 핸드폰 안테나는 '전송 지역 이탈'로 뜬다. 친구는 내 손을 꽉 잡았다. 우리 이제 어떡하지?
그때, 어둠 속에서 택시 아저씨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좀 도와줘요!!"
"무슨... 일이지?
그제야 우린 뇌 정지 상태에서 깨어나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밖으로 주섬주섬 나갔다.
"맙소사..."
가슴이 철렁하고, 숨이 멎을 뻔했다.
건너편 길에 사슴 한 마리가 쓰러져 있는 게 아닌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길 위는 정말 보이는 것 없이 깜깜했다. 휴대폰 빛이 없다면 우린 서로의 얼굴도 못 알아볼 정도로. 우리 택시 말고는 한참 동안이나 차가 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인적이 드면 길이었다. 우리는 택시 아저씨를 도와 사슴을 차 트렁크로 옮겨왔다. 뿔도 안 난 어린 사슴이었다. 사람들이 다가와도 너무 힘들어 반항하지도 못하는 녀석. 숨을 할딱할딱, 입에서는 입김을 내뿜으며 힘겹게 숨을 이어갔다. 사슴 같은 눈을, 아니 초롱한 진짜 사슴 눈을 깜박이며 그 아이는 우리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이 너무 애처로워 나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러운 털에 따뜻한 온기가 손으로 전해져 다시 한번 가슴이 철렁했다. 피가 뜨끈했다. 정말 살아있는,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전해졌다. 아가. 빨리 병원으로 옮겨줄게.
택시기사 아저씨는 곧 시동을 켜 출발시켰다. 그렇게 화기애애했던 택시 안 공기는 사슴에 대한 걱정으로 한 순간 무거워졌다. 말씀을 재미있게 하시던 택시 아저씨도 전화로 몇 군데 하시고는 말이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을 달리다가 택시 아저씨가 무거운 공기를 가르고 입을 떼었다.
"여기 제주도는 이런 일이 종종 있어요. 한때 사슴사냥 때문에 사슴이 멸종될 뻔했다가 제주 도민들 노력으로 요즘엔 사슴들이 많이 번식하고 살고 있죠. 사슴 명찰도 달아주고. 우리끼리는 동물병원이랑 도청이랑 다 네트워킹이 되어있어서 위급할 땐 다 그렇게 갑니다. 한밤 중에 이렇게 도로에 뛰어든 사슴들이 차에 치어서 죽기도 하는데, 아마도 친 차가 외부사람이었을 겁니다. 방법도 모르고 무서워서 그냥 내뺀 거죠. 여기 사람이었으면 아마 동물병원에 데려다줬을 거요."
"......."
"너무 걱정 말아요. 저 정도면 죽진 않을 겁니다. 어린놈이 놀래서 저런 거지."
이렇게 말하는 택시기사 아저씨도 사뭇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긴 왜 걱정이 안 되겠냐 말이다.
모두들 걱정 한 보따리씩 안고, 택시는 어느덧 제주시내로 들어섰다.
"진짜 병원 데려가시는 거죠? 다른데 안 가시고?"
목적지에 다다르자 혹시나 나쁜 곳으로 데려갈까 걱정하는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질문을 했다.
".... 남은 여행도 잘하시오~"
들으신 건지 못 들으신 건지, 택시기사 아저씨는 서둘러 차를 출발했다. 아저씨 얼굴은 사슴 생각에 정신이 없으신 듯했다.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하긴 뿔도 안 난 어린 녀석을... 에잇.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만졌을 때 손끝에서 느껴진 생명의 따스함... 사슴이 나를 바라보던 애처로운 눈빛, 그 끈적하고도 뜨거운 피.. 그 촉감이, 그리고 녀석의 생명력이 나에게로 전이되는 것만 같았다.
scene 3. 2006 영국
우리는 파리 드골 공항에서 프랑스 차 푸조를 리스했다. 복잡한 파리를 빠져나와 벨기에 브뤼셀에 잠시 머문 후 깔레에서 페리를 탔다. 에든버러 축제가 시작되는 8월 11일까지 입성해야 했기에 조금 서둘러야 했다. 번지르르한 차만 있을 뿐 가는 동안 우리는 극빈곤에 시달려야 했다. 남미에서 유럽으로 넘어오면서 여비를 충분하게 가져오지 못한 데다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둔 텐트를 그대로 놓고 왔기 때문이다. 돈을 모아 텐트 두 개와 버너에 넣을 가스를 샀다. 다행히 차는 한국에서 미리 빌려 놓은 터라 예정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숙소를 잡을 돈이 없어 휴게소에 차를 세워두고 옆에 텐트를 치고 자다가 강도를 당할 뻔도 했다. 그야말로 위험한 여정이었다.
페리로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 도착했다. 잘 곳도 마땅치 않았고, 인터넷 사용하기도 수월치 않아 우리는 무조건 북쪽을 향해 달렸다. 빨리 에든버러에 도착해야 제대로 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차는 8인승 승합차였지만 여정이 워낙 긴지라 뒷좌석에 악기와 우리 짐을 싣고 나면 우리 네 명이 앉을자리도 마땅치 않았다. 90도 각도로 앉아서 하루에 8시간씩 운전해 올라갔다.
그날 역시 에든버러를 향해 달리는 길이었다.
내 자리는 오른쪽 뒷좌석 바퀴 쪽이었다.
깜깜한 밤. 2차선 한쪽 방향으로만 되어있는 길. 국도 주위는 가로등 하나 없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동차 전조등으로 비추어진 길은 평지에 끝없는 숲길이 었다. 다들 피곤한 나머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 역시도 그랬다. 조금이라도, 쪽잠이라도 자두어야 할 것 같았다.
120킬로미터 속도로 한참 달리다 보면 속력이 얼마나 빠른지 무뎌지기 마련이다.
그냥 차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뿐.
"엇..!!"
운전하는 친구가 나지막이 소리를 질렀다.
그리 크게 낸 소리도 아니었는데 우리는 어떤 이상하고도 불길한 기분에 휩싸여 깨어난 순간,
오른쪽 바퀴 쪽에 물컹, 그리고 우두둑 짓이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뭔지 모르지만 순간 우리 모두 소름이 돋았다. 기분 나쁜 소름이었다.
"이건 뭐지?"
어리둥절한 우리에게, 운전하는 친구가 말했다.
"......... 토끼 밟았어."
"오... 마이갓....."
로드킬.....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로드킬.... 잊을 수 없는 기분 나쁜 뒷바퀴의 느낌. 내 발로 밟은 것처럼 생생했다.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살인이다.
속력을 줄였다면 우리 차가 사고 날 뻔 한 상황.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생명이 왔다 갔다 했던 그 순간, 차에 있던 우리가 동시에 느낀 그 불길한 예감.
그리고 토끼가 바퀴에 깔려 뼈가 으깨지고 살이 터지는 그 생생한 느낌..... 으윽.... 토할 것만 같다.
again scene 1.
문경새재 저리 가라 하는 코브라 백 마리 길.
오른쪽으로 돌자마자 왼쪽으로 돌아 다시 오른쪽, 왼쪽 180도 유턴 길
30여분을 그렇게 운전하며 내려와 드디어 평지에 내려오는 순간,
작은 산짐승이 도로로 뛰쳐나왔다.
"로...... 로드... 킬.....?"
튀어나온 그 녀석은 길을 가로질러 뛰어가다 중간에 서서 귀를 쫑긋 세우고 번쩍이는 헤드라이터를 바라본다. 갈색 토끼였다.
"저 녀석 뭐하는 거야. 빨리 뛰어가지 않고!!"
엑셀에서 발을 떼고 핸들을 틀었다. 그 갈색 토끼 유유히 가던 길을 간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휴우.."
다행히 건너편 차도 없었고, 뒤따라 오는 차도 없었다. 구불구불 내려온 길이라 자동차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 토끼녀석과는 그래도 거리가 있어서 당황한 가운데 피해 갈 수 있었다.
"우와 정말 미친 토끼. 자기 목숨 위태로운 줄도 모르고 쳐다보고 있냐...."
토끼 탓으로 돌리긴 했지만, 내 심장은 발등까지 떨어져 있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 눈빛.
2006년 에든버러 가는 길이 떠올랐다. 나는 종종 그때 그 로드킬 꿈까지 꾸었다.
'살생할 뻔했어..'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그 상황..
이건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 죄를 짓는 느낌과 더 가까울까?
살생의 그 느낌, 뇌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그 생명. 소중할 뿐만 아니라, 자의든 타의든 해가 갔을 때 그 자신도 얼마나 상처와 충격이 큰지 새삼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순진하게 바라보던 토끼의 눈빛, 그리고 할딱거리던 사슴, 짓이겨진 어느 녀석의 몸. 그 기억은 꽤 오래 잊히지 않는다. 죽음을 목도했을 때 나도 모르게 느껴지는 죄책감. 그러나 우린 의식하지 않은 삶 속에서 많은 살생을 한다. 그러니 의도한 학대와 살생은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인간은 참으로 잔인하다.
후.. 죄짓고 살긴 힘들겠어..
@ Sedona, USA 2012
@ Jeju, KOREA 2009
@ Edinburgh, SCOTLAND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