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서늘해져 에어컨을 끄고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 훅 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읽어야 할 책을 옆에 수북이 쌓아두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도시의 붉은 십자가가 하나 둘 꺼지고 밤이 깊어질수록 아파트 불도 까무룩 꺼진다. 대로의 차도 사라지고 티비 소리도 멈추고 주위가 고요해졌다. 지금 시각 새벽 1시 30분. 소음이 잦아들자 귀뚤귀뚤 풀벌레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찌르찌르쿨쿨쿨쿨귀뚤귀뚤. 사방에서 나는 풀벌레 소리. 바람이 차졌다. 벌써 가을인 건가. 서울 한복판에서 계절이 흐르는 것을 느낀다. 책을 덮고 얼른 짝꿍을 불러 소파에 옆에 앉히고는 한참을 들었다. 스르르 눈을 감아본다. 여기가 어딘지 아득하다. 좋다.
도시의 계절을 우리는 늘 뒤늦게 깨닫는다. 피어나는 꽃도 뉴스를 통해 보고 늘 어딘가에 들어가 따스한 가을볕을 쬘 일도 손에 꼽는다. 추워서 옷을 입고 더워서 바지가 짧아진다. 도시생활은 우리의 감각을 참 무디게 만든다. 일에 파묻혀 살다 보면 낮과 밤이 바뀌고 계절이 가는 줄 모르고 그러다 눈이 내리면 그제야 한 해가 그렇게 가는구나 싶다. 일 년이 훌쩍 가버려 나이를 먹는 것이 서글플 뿐.
그런데 늘 바람은 불고, 꽃은 피고, 하늘은 높다. 나만 알아채지 못했을 뿐 풀벌레는 열심히 몸을 비벼 소리를 냈고, 과일은 익고, 향기를 품는다. 봄과 여름 그 사이 잎새향이 있고, 여름과 가을 그 사이 바람의 온도가 다르다. 지루하지 않은 자연의 변화 속에서 그 미묘함을 알아채는 것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탐구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도시의 삶 속에서 청각과 후각, 촉각이 무뎌지는 동안 사람에게는 시각과 미각만 남아 미처 채우지 못한 탐구의 욕구에 집착하는 건 아닐까. 자연스러움을 잃는 것은 인간다움과도 연결되어 있다.
밤이 되어서야 도시의 열기가 사라지고 자연이 남았다. 그저 서울 한복판에서 나는 찌르찌르 풀벌레 소리가 신기하다. 좋다. 나의 모든 감각은 활짝 열려버렸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내일은 아무 일도 없으니 이 청량한 밤을 즐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