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와 쉼, 그리고 생각
나는 매월 일정금액을 내고 커피를 구독한다. 미식가도 아니고 커피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집의 커피가 내 마음에 든 것이다. 96도로 물을 끓여 답답해 하면서도 천천히 커피를 내린다. 엄마와 함께 먹을 때면 머그컵에 한 잔 내려서 엄마에게 1/3을 덜어주고 목넘기기 딱 좋은(마실 때 따끈한 정도) 커피를 마시며 엄마와 대화를 한다. 컵 바닥에 세 모금이 남을 정도가 되면 식탁에서 일어서서 내 책상으로 간다. 책상에 앉아 일을 하다가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입 안에 고요히 퍼지는 커피향이 아쉬워서 남은 두 모금은 조금 있다가 먹기로 한다.
시청에 들어오기 전에 커피는 그저 누군가와 대화를 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수 많은 수단 중 왜 커피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커피가 가장 접근하기 쉬웠다.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차 한 잔 하시겠어요?” 로 시작한다. “뭘로 하시겠어요?” “음. 커피요.” 이렇게 간단하게 대화가 시작된다. “혹시 녹차 있어요?” 라고 묻는 이도 있기는 하지만 99%가 ‘커피’를 선택한다.
회의를 할 때에는 물을 선호한다.
시청에 들어오고 나서 하루에 커피를 여러 잔을 마시게 되고 위염이 생겼다. 회의가 많았던 탓이다. 그러한 이유로 회의에 들어갈 때면 미리 물을 챙겼다. 그래도 하루 한 번은 커피가 그립다. 하루 한 번은 혼자 생각할 시간도 필요했다. 시청 들어오기 전에는 혼자 일할 때가 더 많았는데 시청에서는 수시로 보고를 받거나 회의를 하거나 면담을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극도로 적다. 생각할 기회도 적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생각을 먼저 해야 하는데 생각할 기회가 적다니 참 난감하다. 가끔은 명상의 시간을 법으로 정해놓아야 한다는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유연근무제를 실시하면서 ‘집중업무시간’이라는 것을 정해 놓은 적이 있다. ‘집중업무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이다. 유연근무로 인해 9시 반에 출근하기도 하고 5시에 퇴근하기도 하고 출퇴근이 유연하니 업무협의를 해야 하는 시간의 범위를 정해놓을 것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대체적으로 공식적인 회의는 오전 10시 또는 오후 2시에 있다. 음.. ‘명상의 시간’은 오후 3시-4시 정도면 좋으려나? ㅎㅎㅎ
그래서 커피를 내리게 되었다. 청사 밖에 나가는 것이 귀찮기도 했다. 직원들은 건물 안에서의 무거운 공기를 벗어나고자 하루 한번 청사 밖에 머무는 시간(점심)을 최대한 활용했다. 머리가 복잡하거나 답답한 마음이 들면 청사를 한바퀴 돌고 오라는 윗 분의 지시가 있었던 적도 있다. 조직에서 불의의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직원들에게 숨쉴 시간을 주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나의 ‘생각하는 시간’은 커피를 내리는 시간이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정리의 시간
탕비실에 가서 주전자에 물을 담는다. 전원 버튼을 눌러 물을 끓인다. 원두를 2스푼 떠서 그라인더에 담는다. 3초간 원두를 갈아준다. 여과지 한 장 꺼내서 드리퍼에 깔아준다. 그 사이 끓은 물을 여과지에 조금 붓는다. 여과지가 촉촉해지면 커피를 담는다. 커피를 평편하게 조금 흔들어주고 물을 부어 적신다. 3초간 기다렸다가 원을 그리며 물을 부어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진행하면서 잠깐 생각을 멈춘다. 덩달아 따끈해진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싸 잡는다. 긴장으로 차가워졌던 손이 따뜻해진다. 커피를 한 모금 머금는다. 묵직한 향이 시작되었다가 끝에 살짝 꽃내음이 난다. 한 모금 더 마셔본다. 목이 따끔한 정도로 넘어간다. 마음이 풀린다. 회의 때 나왔던 의견들을 떠올리면서 내용을 적어본다. 의견을 되새김해본다. 내 생각을 정리한다. 그렇게 10분도 안되는 잠깐의 쉼은 긴장했던 마음에 여유를 준다. 커피를 다 마시고나서는 본격적으로 수첩에 회의내용을 정리하면서 앞으로 해야할 일들을 적어본다.
원두를 갈아서 내려 먹다가, 캡슐커피를 한동안 먹기도 했다. 직원이 집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기계를 가져왔는데, 캡슐커피는 각자 사와서 먹었다. 진한 커피는 늦은 오후 3시의 졸음을 쫓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다가 한 동안은 출근길에 스타벅스에 가기도 했다. 스타벅스 굿즈 중에 피규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운이 그렇게 좋지는 않아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누릴 수 있는 큰 사치였다. 그 때 운이 좋아 얻은 피규어는 지금도 내 책장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직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쉽고 간편한 방법은 커피를 사는 것이었다. 직원들과 소통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커피를 사는 것이었다. 직원들을 위로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바로 커피였다. 이래저래 커피는 내 공무원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 다시 혼자, 커피를 내리면서 쉼을 얻는다.
공무원으로 있던 시절의 습관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아침에는 오늘의 할일을 수첩에 적는다. 생각만 하는 것보다는 일단 적어보면 내가 할 일의 순서가 정해진다. 딱히 오늘의 할 일이 생각나지 않거나 없다면 ‘나의 다짐’이라던가 ‘유명한 문구’라던가 어제 화가 났던 일에 대해 적는다. 좋았던 일도 적는다. 아무거나 적는다. 오후가 되면 어디까지 했는지 적는다. 무슨 일을 했는지 적어본다. 언제 무슨 일을 했는지 적는다. 이 모든 ‘적는’ 일들은 커피와 함께 이루어진다. 커피를 마시면서 하루를 기록하는 일은 내게 ‘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