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아르코스-비아나

6/19 8일 차

by 크리스탈

가방 1.80

식품 7.15

알베르게 8.0

간식 1.40


6시에 일어나기로 해놓고 6:28에 일어났다 하루 안 걷고 걸으니 너무 피곤해서..

아침을 미현의 빵과 커피로 먹고 출발 전에 알베르게 상주 의사로부터 왼쪽 새끼발가락에 '전문적인' 드레싱을 받았는데, 평소 굉장히 농담쟁이 아저씨인데 상처를 보더니 완전 심각해져서 진짜 의사 같았다. ㅎㅎㅎ


왼쪽 신발을 엄청 루스하게 해서 붕대로 싼 발을 압박하지 않도록 하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20킬로만 걸으면 되기 때문에 마음이 가벼웠고 업다운이 있는 길이었지만 걸을만했다.

산솔에서 만난 첫 바에서 미현이 커피를 사줬다. 고맙게 마시고 일어섰는데 50분 가까이 쉬어서 깜놀. 바에서 산 킨더 초콜렛과 바나나 한 개를 나눠 먹으며 비아나까지 왔다.

발은 화끈거리고 욱신거리고 가슴도 아프고..


힘이 남으면 로그로뇨까지 가려고 했지만 1:40에 알베르게 들어가자마자 쓰러졌다. 산페드로 성당은 다 허물어지고 남은 건물 일부를 수리해서 알베르게로 사용하고 있다.

3시 반까지 누워있다가 동네 잠깐 나가보니 다 문 닫고 바만 열었다. 저녁때 다시 나오기로 하고 숙소로 가서 믹스커피 한잔에 쿠키 먹고 정신을 차렸다.

냉장고에 감자가 있길래 감자전 해 먹으려 열심히 채 썰었는데 기름이 없다! 기름인 줄 알았는데 비니거 ㅠㅠ

미현이 독일 아저씨 올란트를 맛있는 거 먹자며 데리고 왔는데 내가 실패해서 없다 하니 아쉬워했다. 셋이 맥주 마시며 수다 떨다가 미현은 빵으로 저녁을 먹는다길래 난 저녁 먹으러 나왔다.

숙소 근처 바에서 순례자 메뉴를 시켰다. 스페인에 와서 처음으로! 빠에야를 (메인메뉴로) 먹어 봤는데 뭔가 내가 대충 만든 볶음밥 같은 느낌이다 ㅎㅎㅎ 하지만 계속 고기랑 빵만 먹다 쌀을 먹으니 살 것 같다. 저녁 먹고는 작은 슈퍼에서 치즈, 햄, 바게트를 사 내일 점심을 대비하고, 저녁 먹고 들어가 미현과 한잔 하려고 칩스와 "큰" 맥주를 샀다. 그리고 며칠 후 짐을 보낼걸 대비해서 작은 색도 사고.


미현이 여행 끝나고 동남아 가고 싶다고 해서 어디가 좋으냐니 필리핀 세부 리조트가(크림슨 리조트) 그렇게 좋단다. 싸기도 하고 리조트 시설이 엄청 좋아서 친구 두셋과 가면 환상적일 거라고. 올 겨울에 윤영이랑 같이 가볼까 생각했다.


미현은 올 상반기에 힘든 일이 많았다. 할머니가 뇌졸중 와서 몸이 불편하시고, 하나 있는 형부가 간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도 아프시고. 이야기 듣는데 눈물이 났다.

실직자일 뿐인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괴로움을 안고 길을 떠나온 것이다. 그런데도 씩씩하고 밝아서 오히려 가슴이 아팠다.


오면서 본 포도밭에 줄의 맨 앞에 장미나무를 심어서 붉고 화려한 장미가 활짝 피어 있었는데 초록색 포도밭과 색상이 대비되어 너무 예뻤다.

한없이 넓은 땅, 저 멀리 보이는 피레네와 이름 모르는 산맥들, 곳곳에 자리한 천년 넘은 마을들. 작은 마을에서 여유롭게 사는 사람들과 좋은 기후, 맛있는 음식들. 참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오늘이 일요일이라서인지 여유 있게 성당 앞에 모여 떠들고 노는 사람들은 서로 잘 아는 듯했고 즐거워 보였다.


부르고스로 갈 때는 가방을 보내고 작은 가방만 매고 갈 생각이다. 허리와 발을 누르는 무게가 너무 커서 걷기가 힘들어서 매일 몸이 힘들다. 25킬로 넘는 날만 짐을 부치기로 하고 세어보니 8-9일 정도가 있다. 총 50유로 정도 든다고 치면 그만큼을 지불하고 내 몸이 가벼워질 걸 생각하면 비싸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때는 짐 부치면 쉬운 줄 알았다.


왜 이 길을 걷는지 생각하면 걷지 못할 거 같다. 그냥 걸으러 왔으니 걷는 거지. 걷다가 웃기도 울기도 하고, 생각도 하고 아주아주 단순해지기도 하고, 누군가를 원망하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고 그렇게 가면 되는 거 아닐까.

여기까지 와서 취업 걱정, 평생 먹고 살 걱정을 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가? 난 생장에서 준 일정표대로 부지런히 걸어 7/17(일) 산티아고 대성당 12시 미사에 참석하면 되는 거다. 부모님과 동생들과 언니, 그리고 그들을 비롯한 가족들과 몇 안 되는 내 친구들을 사랑하며 축복하는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목표이다. 인생에서 결국 내가 가진 자산이란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뿐이다. 돈과 물질은 내 몸을 편하게 할지라도 나를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하지는 못한다. 여기 와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다들 누군가와 함께 행복한 순간을 나누고 즐거움을 공유하는 모습을 보며 나의 가장 큰 재산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누구를 미워하고 피하고 괴롭히고 멀리하는 데에 에너지를 쓰는 게 인생에서 얼마나 큰 낭비인지 느낀다.

가장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은 부부, 파트너, 또는 친구들. 서로를 너무나 철저히 믿고 의지하며 아껴주며 길을 가는 모습이 너무 부럽다. 젊고 멋진 이성도 훌륭한 풍경도 아닌 함께 하는 사람들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 것이나의 모습. 어색하고 신기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에스테야-로스아르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