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꾸리기

없으면 안되는 것들만 챙기기

by 크리스탈

배낭 꾸리기는 준비하면서 정말 많은 글들을 읽어보고, 책에서 참고하며 자신 있다고 생각했었다.

출장을 많이 다니면서 1주일 짐이 기내용 캐리어 하나면 충분하고도 남고, 이삿짐도 후다닥 잘 정리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잘 사는 버티기 정신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주 단출하게, 배낭 무게 포함 7킬로 미만으로 가뿐하게 꾸릴 자신이 있었다.


여성은 배낭 무게 포함 6-7킬로, 아무리 무거워도 8킬로를 넘지 않도록 짐을 싸라는 얘기를 수없이 많이 들어서,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배낭을 사겠다는 결심으로 인터넷과 오프라인 매장을 샅샅이 뒤졌다. 어깨가 짓눌릴 테니 어깨끈 쿠션이 있는 것, 등짝에 너무 딱 들러붙어 덥지 않도록 굴곡이 진 것, 프레임이 어느 정도 있어 짐 무게가 분산이 될 수 있는 것을 고르기 위해 한참 헤매다가 딱 내 거다! 싶은 배낭을 찾았다. 몇 년 전 모델이지만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며 1.4킬로로 시중 제품 중 최저 중량에 속하는 55리터짜리 오스프리 배낭을 샀다. 배낭 사러 다닐 때가 제일 신났었는데, 다들 산티아고 가냐고 물어보고, 으쓱해하며 그렇다고, 2주 후에 떠난다고 자랑하듯 답하곤 했다.


떠나기 전 날, 준비물을 하나씩 챙겨보는데 다들 그렇듯 온갖 물품이 필요할 거야! 라고 걱정하며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챙긴 물건 목록은 다음과 같다.


경량패딩 1, 방풍 점퍼 1, 긴팔 셔츠 2, 반팔 티셔츠 3, 바지 2, 잠옷바지 1, 브라 3, 팬티 3, 양말 3, 습식수건 1, 모자, 물통, 깔개, 비옷, 충전기, 플러그, 랜턴, 쪼리, 단화, 셀카봉, 먹는 약들, 물집방지 크림, 1회용밴드,

치약치솔, 샴푸, 비누, UV로션, 빨랫줄, 빨래집게 10개, 스틸머그, 반짇고리, 생리대, 침낭, 옷과 물건 소분한 파우치 3, 등산스틱, 선글라스, 커피믹스 10개, 책 1권


하나씩 챙길 때는 이건 넣어도 되겠지 하며 넣기 시작했는데, 합쳐지니 최종 무게가 어마어마했다.

별도 가방의 무게까지 합쳤으면 아마 10킬로는 넘었을 것 같다. 짐을 부칠 때 보니 배낭 무게만 8.3킬로. 와.. 망했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일단 생장 가서 짐을 좀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장에서 물통을 버리고 출발했다. 어차피 나는 장이 좋지 않아 수돗물은 못 먹으므로 생수를 사 먹어야 하는데 무슨 생각으로 물통을 가져갔는지 모르겠다. 깔개도 한참 가지고 다녔지만 한번 썼던가? 해서 중간에 버렸다. 입은 옷 그대로 주저앉고 툭툭 털고 일어나 하루 종일 걷다 보면 아무리 깨끗한 곳을 골라 걷는다 해도-사실 불가능하지만-먼지로 뽀얘지고 뭔가 오염이 잔뜩 되어 깔개를 깔고 앉는 의미가 없었다.


옷을 너무 많이 가져갔다는 것을 1주일이 지나자 깨달았다. 경량패딩은 안 가져갔으면 6월 말까지는 추워서 큰일 날 뻔했는데, 반팔 티셔츠는 하나면 충분했고, 잠옷 바지도 필요 없었다. 어차피 샤워하고 갈아입은 새 옷을 입고 자고, 아침엔 세수만 하고 나오는 게 가장 편하고 빨래도 줄일 수 있는 것이었으니.

속옷과 양말도 딱 2개면 충분했다. 입은 것 하나와 갈아입을 것 하나. 물론 중간에 팬티 하나를 잃어버렸고, 신은 양말이 너무 두꺼워 속옷과 얇은 양말을 샀다. 천년 전의 순례길도 아니고, 뭔가 없으면 어차피 도착한 마을에서 사면되므로 여분을 가져가는 것이 의미가 없다.


그리고 동생 부부가 준 책. 왜 내가 가이드북도 아닌 책을 가져갔는지는 오직 신만이 아실 듯. 단 한 번도 펴 본 적이 없는 순례길의 성당과 성지에 대한 책인데, 가기 전에 이미 내가 구입해서 읽었던 책이었다. 동생이 순례길 곳곳에 볼만한 곳들이 많으니 가져가면 구경하는데 도움될거라는 생각에 샀다길래 아무 생각없이 가방에 넣었다. 물론 출발 전엔 나도 마을의 성지나 성당을 들러 경건한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걸로 생각했다. 순례길의 본 모습도, 나 자신도 잘 몰랐던 나의 불찰.


제일 바보 같은 짓은 가이드북을 가져가지 않은 것. 관광책자는 가져가면서 가이드북을 안 가져갔다는 사실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나도 지금 그때의 내가 이해가 안 되니까.

순례길에는 사람들이 많아서 따라가기만 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믿어버렸다. 사람들을 따라가면 되겠거니 생각하고 아무 생각 없이 갔는데 막상 길에 서니 막막함이 밀려왔다. 의외로 혼자 걷는 구간도 많았고 같이 다니다가도 간격이 벌어지면 혼자가 되고 날씨가 험해지면 앞이 잘 안보이기도 해서 중간에 길을 잃을까 걱정도 됐다. 다행히 초반에 동행이 생겨 중반까지 동행 덕분에 별 걱정 없이 다녔는데, 동행과 헤어지고 본격 혼자 걷기 시작하자 가이드북이 필요했다. 어느 마을에서 제일 많이 보는 가이드북을 한 권 샀는데 왜 진작 안샀을까 싶을만큼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 책을 제일 많이 보는듯

http://www.caminoguides.com/camino_frances/index.html


같이 걷던 사람들 중 독일에서 온 여행자 한 명은 그날 걸을 루트에 해당하는 책의 페이지를 찢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해당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 종이를 버렸다. 그래서 매일 몇 그람씩의 종이 무게마저 줄여갔다. 다음에 간다면 나도 그래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아! 난 다시 가지 않기로 했지만.


또 하나의 필수적인 물품 중 바보같은 선택은 신발에서 있었다. 신고 다니는 등산화 외 필요한 건 플립플랍(일명 쪼리)였고, 그 외 신발을 하나 더 가져간다면 물집이 잡혔을 때 걷기 수월한 샌들을 가져갔어야 했는데, 난 멍청하게도 크록스 단화를 가져갔다. 순례길 내내 단 한 번도 신지 않았고, 발이 점점 부어가면서 맞지도 않아서 울면서 짐짝으로 지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짐들 때문에 너무 힘겨워져서 중간에 짐을 산티아고 우체국으로 부쳤다. 거의 2킬로에 가까운 짐을 빼고 걷기 시작한 첫날 오전만큼은 날아갈 것 같았다. 딱 오전이 지나고 오후가 되니, 다시 물 먹은 솜처럼 축축 처지는 것이, 짐이 조금 줄어드는 게 큰 영향이 없나 보다 싶었지만, 그렇게 하루하루 조금씩 체력 손실을 더 했다면 후반부에 아주 많이 힘들었을 수도 있었단 생각이 든다.



다시 짐을 싼다면


죽어도 다시는 이 길에 안 와!라고 백 번쯤 말했지만 혹시 다시 간다면 정말 없으면 안 되는 것만 가져갈 것이다.

다시 정리해 본 짐 목록은 많이 간소해진다. 옷이나 양말은 입고 걸치는 것 합친 개수이다.


경량 패딩 1, 방풍점퍼 1, 반팔 셔츠 1, 긴팔 셔츠 1, 긴바지 2, 아래위 속옷 2벌, 양말 2, 습식 수건 1, 가벼운 우의, 쪼리, 샌들, 칫솔, 치약(제일 작은 것), 비누 반쪽, 1회용 샴푸(파우치) 10, UV 로션, 침낭, 등산스틱, 반짇고리, 선글라스, 가이드북, 먹는 약, 베드벅 방지 시트(!),


위 목록 중 반드시 챙겨야 할, 미리 알았다면 반드시 가져갔을 아이템은 마지막에 쓴 베드벅 방지 시트다.

싼 것은 9.99달러부터 25달러까지 다양한데, 아래 시트는 12.9달러짜리다. 호주 친구 하나는 항상 가져 온 베드벅 방지 시트를 깔고 잤는데, 최소 한번 이상씩 벌레로부터 공격 당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단 한번도 물린 적이 없었다. 나도 한번 제대로 물리고 그 친구가 어찌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후 가는 곳마다 이걸 살 수 있나 알아봤는데 어디에도 없었다.

순례길 이후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아웃도어 용품점에도 가봤지만 없어서 포기했는데, 바르셀로나에서 또 한번 벌레에 물려서 아주 학을 뗐다. 앞으로 여행을 가게 되면, 호텔이 아닌 이상 이걸 꼭 가져갈 생각이다.


순례길 이후 한달 반 정도 여행이 이어져 있어서 짐을 쌀 때 고민이 많았다. 여행 내내 순례길 행색으로 다닐 수도 없고, 이후에 필요한 물건들까지 가져갈 수도 없었다. 결국 순례길 끝나면 그동안 입고 사용한 것들은 다 버리고, 필요한 모든 것을 모두 사자! 하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등산화까지 버리고 올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순례길을 다 걷고 나니, 등산화는 내 분신 같은 존재가 되었다. 피스테라에 가서 순례자의 풍습대로 등산화를 활활 불태워버리리라! 했는데 너무나 정이 들어 버렸고, 유일하게 챙길 기념품이 있다면 등산화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후 여행 다닐 때 신고 다녔다. 그리고 등산화가 의외로 장거리 걷는데 발목을 보호하고 충격흡수가 잘 되어서 피로감이 덜해서 좋기도 했다.


어떤 여행이든 짐은 역시 적을수록 좋다. 정말 아무것도 안 가져간다면? 입은 옷과 신발, 모자, 선글라스, 가이드북, 필요한 약, 등산스틱 정도가 될 것 같다. 세면용품이나 일회용 밴드 같은 것은 모두 거기서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행자여, 불안해서 견딜 수 없을 만큼 배낭을 비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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