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의 언어로 마음을 사로잡기
어떤 브랜드 매니저라도 자신이 맡고 있는 브랜드에 대해 자부심과 갈등을 함께 느낀다. 잘 되면 잘 되어서, 못 되면 못 되어서, 브랜드는 항상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 교정, 실험을 하게 만든다.
브랜드는 전방위적이고 총체적 투자와 실행을 통해 커지고 사람들 속에 자리잡게 되는데 이를 위한 단계 중 가장 앞단의 일, 브랜드 아이덴티티 설정이 가장 힘들기도 하고, 기간 대비 많은 리소스를 투자하기도 한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브랜드의 존재이유기도 하다. 브랜드를 만들 때 왜 그 브랜드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규정하고 명문화 한 것이 브랜드 아이덴티티 정의문(statement) 이다. 물론 이 정의문 없이 먼저 제품,서비스를 제공하다가 뒤늦게 브랜드로서의 의미를 정리하며 정의문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두 경우 모두 경험해 본 결과 어느 쪽도 쉽지 않았다.
없던 것을 만들 때가 더 힘들 것 같지만, 때로는이미 오랫동안 존재하고 있는 브랜드의 존재이유를 명문화하는 것이 더 복잡하고 까다롭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브랜드를 알고, 자신만의 이미지나 방식으로 사용하고 커뮤니케이션 하고 있기 때문에 각양각색의 아이디어와 느낌으로 이야기하는 것들을 종합해 아이덴티티란 이것입니다 하고 내놓기가 여간 고민스럽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제품 브랜드와 기업 브랜드 아이덴티티 작업을 각기 세 번 했는데, 기업 브랜드 아이덴티티 작업은 제품 브랜드 아이덴티티 작업보다 훨씬 어려웠고, 결과에 만족하기도 어려웠다. 작업의 난이도가 높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전사적인 리서치가 있어야 하고, 공통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끄집어 내어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제품을 하나 런칭하는 것에 비해 이해관계자가 훨씬 많아 조정도, 정리도 몇 배 이상 시간이 걸리고 어렵다. 과정의 어려움을 간단히 날려버리는 것은 애써 만들어 놓은 브랜드 아이덴티티 정의문이 임직원들에게 “와 닿지 않는다” 는 반응이다. 매우 당황스럽다. 수 개월에 거쳐 임직원들 스스로 이야기 한 내용이 한 줄의 정의문이 되는 순간 돌아오는 말이 "내가 이야기 한 것은 이거랑 좀 다른데.." 라면 결과물에 자신감이 급격히 떨어지기도 하고, 실망도 된다.
도대체 어떤 부분이 자신의 생각이나 기대와 다른지 알려달라고 하면 사람들은 명확히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그저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라는 이야기만 반복할 뿐.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만들 때는 가능한 쉬운 단어나 문구, 즉시 이해되거나 재미있게, 호감을 갖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 아이덴티티 정의문이 충분히 포괄적이면서 직관적으로 만들어져 나오면 그대로 외부 커뮤니케이션에도 쓸 수 있으므로 효율적이다. 하지만 기업브랜드 아이덴티티작업을 해 보면 결과물이 거의 예외 없이 미래지향적이면서 가치를 표현하는 문구로 작성되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게 만들어진 아이덴티티 정의문을 대외 커뮤니케이션에 바로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너무 포괄적이거나 뜬구름 잡는 좋은 이야기, 알맹이 없는 허풍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한 문장 또는 문구로 정리해 냈다면, 그 다음에 할 일은 만들어진 아이덴티티를 전파하는 것이다. 외부에 아이덴티티를 전달하기 이전, 내부 임직원들이 먼저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도록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 과정을 내재화라고 한다. 이 부분은 브랜드 구축 작업 중 가장 간과되기 쉽지만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임직원에게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철저히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켜야 하는 이유는 임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현하고 전파하는 매개이면서, 외부의 시선에서 볼 때 해당 브랜드아이덴티티 그 자체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파 작업의 가장 큰 난관이 바로 임직원들의 브랜드 내재화 단계이기도 하다. 명문화 한 브랜드 정의문(statement)을 임직원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은 거의 모든 브랜드 매니저가 가지는 가장 부담스럽고 상상하기 싫은 것이다.
이 단계가 전체 브랜드 구축 작업 중 난이도가 제일 높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나 역시 임직원 전파 과정이 대소비자 커뮤니케이션 보다 더 긴장되고 어려웠다. 이유는 내부 사정을 잘 알고 비즈니스를 하면서 얻은 각자의 업과 브랜드에 대한 인사이트가 있기 때문에 왠만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고, 새로운 의견이나 생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판은 덤이다.
임직원 전파 교육을 할 때의 상황은 1) 아이덴티티와 슬로건이 모두 개발되어 있거나 2)아이덴티티만 개발되어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슬로건까지 개발해 놓으면 그나마 상황은 덜 힘들게 흘러갈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덴티티가 있는데 슬로건을 왜 또 개발했는지, 그 둘이 왜 다른지 이해시켜야 하는 난관에 봉착하게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우리 회사는 어떠한 가치를 지향하므로 아이덴티티가 A인데, 이 아이덴티티 문구 A는 개념을 설명하는 문구이므로 브로셔나 홈페이지와 같은 외부에 커뮤니케이션 하는 매체에 사용하지 않을 것이지만 우리의 정체성이니 기억하고 새기고있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 외부에 사용한 문구는 B다. B는 내용은 A와 같지만 소비자언어로 변형된 것이므로, 홈페이지와 브로셔에 사용한다. 그러다가 신제품을 출시하거나 비즈니스에 변화가 필요할 때는 A를 보고 판단해라”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하고 멍한 얼굴로 쳐다보다 슬금슬금 손을 들고 질문을 한다.
아이덴티티 정의문 자체를 왜 외부에 쓰면 안되느냐, 그대로 쓰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만약 슬로건이나 광고문구가 없을 경우는 정의문은 됐고, 고객에게 소통할 문구나 단어를 달라고 요청하거나, 만들어진 슬로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 등 어쨌든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의 표출은 여러갈래다.
나 역시 고민이 많았다.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어야 하는가? 아이덴티티가 바로 브랜드 슬로건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임직원들은 왜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원망스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직원들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에게 메시지의 층위를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브랜드업무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브랜드 아이덴티티 설정의 방법론이나, 단계, 특정 용어 등을 알지 못한다. 같은 회사 동료라지만 보통의 소비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니 임직원 전파 교육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1차 소비자에 대한 메시지 전송이다. 소비자에게 브랜드 아이덴티티 설정의 복잡한 프로세스나, 논리 구조를들이대며 이해하라고 억지를 부릴 수 없는 것처럼, 임직원들에게도 방법론의 이해나 양해를 기대해선 안되는 것이고, 이 단계에서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생긴다면 뭔가 다시 손을 봐야 한다는 시그널이니 몰라서 그러는거라 무시하지 말고, 다시 처음부터 짚어가 보는 것도 꼭 필요하다.
아이덴티티 설정은 브랜드의 본질 그대로가 언어로 표현되고, 이해되고 공감되며, 호감을 얻을 수 있으면 더 말할 나위 없이 바람직하다. 최고의 아이덴티티이고, 최고의 브랜드 구축 작업이다. 그러나 이야기 해야 할 것이 형이상학적이고, 가장 정확하게 언어화 해 놓아야 하므로, 그 표현들은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이거나 솔깃하게 들리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정확하고 분명하지만 매력적이지 않은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래서 아이덴티티 작업을 하면 보통 아이덴티티를 기반으로 대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메시지를 소비자 언어로 다시 만든다.
즉, 아이덴티티를 규정하는 정의문이 있고, 브랜드 슬로건 또는 태그라인이 개발되고, 그 다음 광고 진행 여부에 따라 광고문구가 개발되는 이중 삼중의 작업이 이뤄진다.
이러한 복잡한 메시지 구조는 필연적으로 오해를 일으키는데, 그 세 가지 표현 문구를 모두 접한 사람들이 그 중 가장 쓰기 좋고, 마음에 들거나 쉽게 기억되는 메시지를 자의적으로 선택해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본질을 왜곡하게 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언어의 경제성과 메시지 전달의 효율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지만 브랜드 매니저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다.
따져 보면 많은 종류의 메시지 유형 중, 광고 문구처럼 좋은 정의문(구)은 없다. 광고의 언어는 철저히 소비자의 언어이고, 그것을 이야기 하는 방식은 감각에 호소하는 메커니즘이고, 수신자의 입장으로 쓰여져 있어서 강력하고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5기가 메모리가 아니라 애정곡 1천곡이 더 직관적이고 명확하며 매력적인 것이다. 그래서 광고대행사 같은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가 슬로건 작업을 함께 하면 좀 더 좋은 커뮤니케이션 메시지가 나와서 브랜드 아이덴티티 전달에도 도움이 된다.
외부에서 보기에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브랜드 슬로건 또는 브랜드 태그 라인(tagline)과 다르지 않다. 브랜드 슬로건이 브랜드 아이덴티티라고 이해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애플의 Think Different, AVIS의 We try harder, De Beers의 A Diamond is forever는 브랜드 슬로건이지만 사람들은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번 정한 메시지를 오래 사용하며 메시지가 힘을 얻게 되고 함의가 풍부해지면서 아이덴티티로 자리잡기도 한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꼭 어렵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일부러 그렇게 만들고자 하는 경우도 없다. 어떤 산업 분야에 있든 아이덴티티는 가능한 소비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게 쉽고 직관적으로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꿈도 크고, 높은 가치를 지향하는 브랜드의 핵심 사상을 일상의 언어로 쉽고 매력적으로 정리하기란 때로는 불가능하다.
아이덴티티 자체를 감각적이고 직관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먼저 하고, 그것이 안 되면 가슴을 사로잡는 슬로건을 만들어 진득하게 사용하는 것이 차선이자 다른 최선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슴으로 받아들여 머리에 저장시킬 언어를 찾는 것이다.
가장 쉽고 간단한 것이 가장 강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