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이 지나고 깨달은 것

순례길이 나에게 준 것

by 크리스탈

순례길을 완주한지 1년 하고도 2달이 지났다.

길을 걸으면서, 다 걷고 나서도, 그리고도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얻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계속 있었다. 과연 얻은게 있기나 한 것일까, 돈만 쓰고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많이 했다.

같이 걸었던 미현도 도대체 순례길이 자신에게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난 무언가 얻은게 있는것 같고, 좋았는데 그게 무엇인지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의문을 품고 살고 있었다.

그러다 올해 봄이 지나면서 조금씩 깨닫게 됐다. 순례길이 준 것이 무엇인지.



1. 나는 혼자 살아갈 수 있다

혼자서 길을 갈 때 외롭긴 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혼자서 지낸 세월처럼 알아서 잘 챙겨먹고, 힘들면 주저앉고, 싫으면 자리를 떠버리며 혼자 잘 걸었다. 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져도 별로 힘들지 않았다. 내 안으로 침잠하고, 사색하는 시간을 더 즐기게 되었다.



IMG_6894.JPG 순례길의 가장 중요한 친구 중 한사람이 이 사진에 있다



2. 그럼에도 누군가가 곁에 있으면 좋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던 짧던 누군가가 곁에 있으면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았다. 조용히 같이 걷기만 해도 좋았고, 맛있는 요리를 잔뜩 시켜 나눠 먹을 수 있어서 좋았고, 힘든 빨래를 대신 널어줄 아량을 서로에게 베풀어 줄 수 있어서 좋았다. 25킬로를 걷고 도착한 알베르게에서 캔맥주 하나를 따서 같이 마시며 걷다가 발견한 것들,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 것도 정말로 재미졌다. 며칠 만에 다시 만난 어느 알베르게의 인연을 조금 더 이어가는 것도 좋았고, 불쑥 먼저 말을 걸어주는 느닷없는 친근함도 내겐 큰 에너지가 되어 전해졌다. 혹시나 하고 가져갔던 경량패딩을 아침저녁에 꺼내 입듯, 혼자 있는 내게 다가온 사람들은 고마운 따뜻함을 주었다.


IMG_7093.JPG 감자전을 만들려다 식용유가 없어서 맥주로 배를 채운 저녁 한 때



3. 모든 관계는 당연하지 않다

가족, 친구들, 지인들로 둘러싸여 사는 우리 인생에서 당연한 관계란 하나도 없다. 생명을 주신 부모님과의 관계도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 친구나 지인들은 어떠랴. 그들과의 관계는 순전히 나의 선의와 열정에 달려있다. 내가 주지 않으면 그들이 내게 마음을 주고, 시간을 할애해 주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동안 가까이 있기에 편하고, 쉽게 생각하고, 잊어버리는 나의 나쁜 습관들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실망과 상처를 주었는지 깨달았다. 절친이라 말하면서 약속을 툭툭 깨고, 고마운 지인이라 칭하면서 내게 주는 것들을 고마운 마음 없이 당연히 받았다. 그 많은 관계가 어찌 내 욕심과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 수 있을까, 그것을 깨닫는데 이렇게 오래 걸리다니, 나는 참 지독히 독선적이고 모순에 가득 찬 인간이었다.


내 옆에 남아있는 인연들, 관계들을 잘 지켜나가고, 서로에게 더 아름다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누군가에게 화가 나고, 실망하고, 보고싶지 않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감정의 파도는 지나간다. 세상 모든 것은 지나가는데, 유독 어떤 특정 감정에 매달려 소중한 관계를 끊어버리거나, 점점 서로에게서 잊혀져야 할까. 그러기에 난 그렇게 중요한 사람도 아닌데. 날 아껴주는 사람들이 내가 가진 자산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IMG_7730.JPG 변호사, 버스운전사, 백수



위 세가지는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뚜렷하고 분명하게 fact를 넘어선 진리로 느껴진다. 혼자서 밥도 잘 먹고, 영화도 보고, 쇼핑도 여행도 잘 하지만, 같이 있어서 더 즐거운 시간이 분명 있고, 그 시간을 함께 하는 사람은 내게 그 순간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라는 것. 한 순간 한 순간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가지게 됐다.




순례길을 처음 계획 했을 때 난 거창한 것을 꿈꾸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 해 보지 못한 일을 했다는 허영심을 채우고 싶기도 했고, 다 걷고 나서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큰 깨우침을 얻고 싶었다. 어떤 일을 하면 세속적 성공을 거둘 수 있을 지, 혜안을 갖고 싶었다. 고작 8백킬로를 걷고 그런 큰 것을 바랬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한심했다. 그만큼에 바꾼 혜안이니 깨우침이니 하는 것이 과연 진짜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의 자기 기만이 되었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밝혀지는 것들이 있다. 인생이 한 걸음씩 걸어 가는 길을 즐기는 것이라면 가면서 발견하는 것들은 오기 전엔 절대로 모른다. 그리고 소위 아무리 날로 먹으려고 덤벼도, 인생은 진짜를 내어 주지 않는다. 이 언덕을 돌아 가야만 저 계곡의 입구가 보이는 것처럼.

다가올 때가 되어야 다가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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