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을 안다는 것의 넓고 깊은 의미
브랜드매니저들은 자신의 제품에 대해 보통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객도 내가 제일 잘 알고, 시장도, 경쟁제품도 자신이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그래야 하기도 한다.
나 역시 그랬다. 나보다 제품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연구소의 담당자 정도?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연구소 담당자한테 제품 수업을 열심히 듣지도 않았고, 제품을 겉핥기로 안 결과 한 번 크게 코가 깨진 적이 있다. 샴푸 브랜드매니저를 했던 주니어 시절 일이다.
내가 맡은 브랜드는 이미지는 괜찮은데 이미지가 제품 판매로 연결이 잘 안돼서 고민이었다. 구매의사가 높지 않고, 제품 침투율도 낮고, 진열에서도 열세였다. 그런 상황이면 보통 소비재에서는 TV광고를 짱짱하게 하는게 제일 쉬운 방법이긴 하지만 불행히도 그만한 리소스는 없었다. 그래서 좀더 경제적이고 실질적인 전략을 세워 개선해 보자고 했다. 그리고 여러 방법 중 하나가 최대한 많은 소비자에게 제품 경험을 하게 해 주자는 것이었다. 본격 성수기인 6-8월을 대비해 미리 사용경험을 주자는 차원에서 준 성수기인 4-5월 두달 간 샘플링을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샴푸린스 샘플링은 10밀리 파우치와 50밀리 미니보틀 두가지로 많이 한다. 시중에서 50밀리, 100밀리 짜리 보틀은 휴대용 세트로 판매되기도 하는데, 플라스틱 병 가격도 의외로 비싸고, 들어가는 용량도 많아서 원가 부담이 제법 되므로 폼을 내야 하는 이벤트에 많이 사용하는 반면 무작위 대량살포를 해야 할 때는 주로 파우치를 이용한다.
의사결정을 받고 공장 라인이 빌 때마다 짬짜미 샘플 파우치를 생산해서 전국 각지로 산더미같이 보냈다. 미친 샘플링은 문제없이 잘 진행됐고 봄이 가기 전 내가 가진 상반기 마케팅 비용의 4분의 1은 거뜬히 써 버릴 기세로 배포되고 있었다.
그런데 남들이 다 하는 파우치 샘플링은 새롭지도 않고, 획기적이지도 않았다. 모든 브랜드들이 다 하는 샘플링의 규모를 좀 키운 걸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에서 이슈를 만들 만 한 캠페인을 생각해 냈다.
당시 리필 상품이 생활용품 시장 전반에서 일제히 출시되고 시장이 놀랄만한 속도로 커지고 있어서, 그 트렌드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가두 캠페인 행사장에 소비자가 빈 용기를 가져오면 최대 500밀리까지 제품을 무료로 담아주기로 했는데, 어차피 내 제품도 리필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브랜드 인지와 사용경험 제공, 향후 리필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구매습관 계도의 세 마리 토끼를 잡을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캠페인을 진행하기 위해 품의서를 쓰려고 하니 당장 문제에 부딪혔다.
이벤트 현장이 주로 길거리인데, 샴푸를 어떻게 담아주는가? 라는 실행의 이슈였다. 그보다 먼저, 공장에서 어떤 형태로 배송을 해 올 것이며, 행사장에서 그 컨테이너를 그대로 사용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유형의 어떤 컨테이너에 담아야 할 것인지, 무슨 기구나 방법을 사용해서 소비자가 가져 온 병에 담아줄 것인지, 실행의 모든 액션 하나하나가 다 퀘스쳔 마크였다.
만약 판매 중인 제품을 개봉해서 따라 줄거라면 정품을 공짜로 주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되고, 본품을 달라는 요구도 있을것 같아 그 방법은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국자로 떠서 깔때기를 통해 통에 담아주는 원시적인 방법도 생각해 봤는데 행사 Look & feel이 브랜드에 별로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아서 그 방법은 도저히 방안이 없을 때 사용하기로 하고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프고 고민은 쌓이는데 뾰족한 수는 없고해서 팀원들에게 이래저래 묻고 다니다 섬유유연제 담당자가 동일한 이벤트를 한 경험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알아보니 일단 행사용 대용량 제품 코드를 하나 생성해, 그 코드로 공장에서 제품을 이벤트 현장으로 출고시키고, 현장에서는 슬러시 기계에다 제품을 넣어두고 사람들이 빈 병을 가지고 오면 따라주었다고 했다. 유레카!!! 내 생애에 그렇게 슬러시가 고마왔던 적이 없다.
그래서 슬러쉬 기계를 중고로 구했다. 의외로 슬러시 기계가 비쌌던 것에 놀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여름 내내 이벤트를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별로 아깝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행사 당일, 브랜드 네임이 멋지게 인쇄된 유니폼을 입은 파트타이머를 세워 놓고 소분에 대한 기준이며, 고객 응대 태도 교육을 시키고서 대망의 1석 3조 이벤트를 시작했다. 기대했던 구름같은 인파는 아니었지만 행사에 관심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부스에 찾아와 제품을 받아갔다. 보기도 제법 그럴듯해 보이고, 빈 병을 활용한다는 환경보호의식이 있는 브랜드가 된 모양새가 무척 뿌듯했는데 시작 후 두어 시간 지나고 문제가 생겼다.
문제는 슬러시 기계였다. 슬러시 기계 전원을 켜 놓아야 레버를 내리면 제품이 나오고 병에 담을 수 있다. 그런데 전원을 켜 놓으면 내부의 회전 윙들이 계속 돌아가는 것이다. 슬러시는 시원하게 먹는 것이다보니 계속 쿨링을 하면서 얼지 않게 저어줘야 하므로 당연히 내부에서 휘젓는 기능이 필요하다. 하지만 샴푸는 거품을 내는 물성을 가진 제품이다보니 회전 윙들이 계속 돌아가자 슬러시 기계 안에서 거품이 잔뜩 차 올라버린 것이다. 처음엔 거품이 좀 생겨도 제품을 따라주는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 시간이 좀 더 지나서 슬러시 기계 내에 제품을 보충하려고 뚜껑을 여니 거품이 넘쳐 났다. OMG..
섬유유연제는 제형상 물에 향과 색, 약간의 유연성분을 넣은 제품이라 거의 물이라고 보면 된다. 물을 넣고 휘휘 젓는다고 무슨 문제가 생기지 않으니 섬유유연제 담당자는 기계 내부에서 회전이 일어난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경험으로 문제 없었다고 내게 말해준 것이다.
그러나 샴푸는 마찰에 의해 거품이 발생하는 물성을 가져서, 내부의 회전 윙이 계속 돌아가면 마찰이 생기고 거품이 발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과관계다. 불행하게도 나는 샴푸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었고, 슬러시 기계 구조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다. 레버를 내리면 제품이 나온다는 사실 하나만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슬러시 기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눈여겨 보았다면 거품이 생긴다는 문제를 간과했을 수가 없다.
그런데 나는 내 제품과는 완전히 다른 제품을 다루는 사람의 말을 그대로 믿고, 내 제품이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될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었다. 내 제품이 관련된 모든 것을 꼼꼼히 알아야 했는데, 제품 자체만을 생각하는 근시안적 태도와 제품이 사용 될 상황에 대한 놀라운 무관심과 게으름이 빚어낸 당연한 실패이자 흑역사의 한 챕터다.
이 날, 이벤트는 예상보다 빨리 끝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행사가 끝나기까지 빈 병을 들고 온 소비자들에게는 파우치와 소형 보틀 샘플을 주어 돌려보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후속 일정은 취소했다.
샴푸 담당이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어? 라고 하겠지만, 그 때 나는 내가 모든 것을 안다는 오만에 빠져 있었던 터라, 슬러시 기계의 특성에 대해 생각해 볼 깜냥도 안됐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내 제품을 잘 모르고, 알아야 겠다는 욕심이나 의지도 없었던 것 같다. (반성*100000000)
브랜드 매니저로서 제품을 안다고 하려면 사용자의 입장에서 사용할 때 어떻다 정도를 아는 수준으로는 안다고 말 할 수 없다.
제품을 안다는 것은 제품 자체의 본원적 기능과 부가적 혜택은 물론, 어떤 고객에게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고 외면받는지, 어떤 다른 제품 서비스와 소위 궁합이 맞아 시너지를 내고, 어떤 제품과는 사용되면 안되거나 복잡함이 발생하는지 등 제품 자체와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케이스에 해결책을 갖고 있는 수준을 뜻한다.
모든 것에 대한 해결책을 갖고 있는 브랜드 매니저는 없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책을 찾거나, 원인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나 방법은 알고 있어야 한다. 중요한 정보들이나 고객 특성, 주요 사용 상황 등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제품의 부가적인 특성이나 좀더 전문적인 정보에 대해서는 모르기도 한다. 거기까지 알기 어려운 경우가 있고, 그 정도까지의 지식은 마케팅에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이라도 깊이 있는 지식이 필요한- 내 이벤트의 경우는 아니었지만 -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이럴 때 제품에 한해 자신보다 더 믿을 수 있는 누군가를 반드시 주위에 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보통 제품 개발자 혹은 연구원들이다. 나 역시 제품에 대해 문제가 있거나 부딪히면 항상 연구소 샴푸 담당자를 붙잡고 늘어졌다.
브랜드 매니저가 제품개발을 직접 하는 경우도 있지만, 연구소나 개발부서를 통해 만들어 내는 경우도 많고, 글로벌 브랜드의 경우 제품을 수입해 판매하기 때문에 제품기획을 직접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에도 내 제품을 제대로 아는 것은 마케터의 당연한 의무다.
만약 자신이 문과 출신이라면 개발자나 연구원들과의 대화는 그들이 한국어를 사용하든 하지 않든 어렵다. 그러니 언어의 문제를 떠나서 계속 제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 이미 잘 알고 있던 제품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고, 위험을 방지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으며 점점 더 전문가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제품 지식은 브랜드를 키우는 여러가지 활동들을 더 깊이 있고, 본질에 충실하게 해 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나는 주니어 시절 거의 비글에 가깝게 관련 팀들, 담당자들을 들들 볶았다. 제품 처방 관련해 조금이라도 모르거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연구소에 수시로 전화를 해서 백치미를 뽐내며 쉽게 설명하라고 귀찮게 굴었는데, 그 이벤트에 대해서는 이야기 할 생각을 전혀 해보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지나가는 말로라도 이벤트 이야기를 했었다면 연구소 담당자들이 문제를 짚어 줬을 수도 있고, 내가 미리 깨달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슬러시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아 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정수기라던가, 아니면 물성으로 볼 때 아이스크림기계가 더 나았을 수도 있다. 아이스크림 기계도 비슷한 구조인가? 뭐 어쨌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