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스-오르니요스델카미노

6/26 15일차

by 크리스탈



커피 0.5

아침 겸 점심 4.7

식품, 소모품 6.5

숙소 6.0

물 0.5


처음으로 메세타 지역을 걸어왔다. 너무 아름답고 평화로운 구간이라 카미노 중 가장 사랑할만한 구간이란 생각을 하며 노래가 절로 나왔다. 파란 하늘에 걸린 하얀 달 조각을 보며 초록 들판 붉은 꽃을 벗 삼아 걷는 길은 참 평화롭고 행복하다.

몸이 안 좋아 진통제 많이 먹고 좀비처럼 걸었는데 내일은 좀 덜 아프고 즐겁게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 여기 오면 바라는 것이 정말 단순하고 소박해진다.


"누구나 다 자기의 길을 간다"라는 말이 계속 머리 속에 맴돈다.

그리고 아무리 미워도 부딪힐 수 밖에 없다면 상황을 내가 만드는 것이 낫다는 생각도 들고.




오르니요스에 도착하면 알베르게에서 와인 한 병 하자며 미현과 약속을 했다. 부르고스도 그냥 지나쳐 왔으니 기분을 좀 내자는 것. 식당에서 와인을 막 따르고 마시는데 한국인이냐며 접근?한 한국 남자.

알고 보니 한국 이민자 요리사였다. 자기 말로는 스페인 왕한테 요리도 해줬고 부르고스 일대에서 자기 모르면 간첩이고 유명하다는데 뭐 그렇겠지 싶고, 어쨌거나 자기만족에 빠져 살 만큼 자신만만한 사람이라 보기가 좋기도 했다. 자신도 순례길을 걸었고-사진을 보니 태극기를 휘감고 걸었더라..음..ㅎㅎ-순례길의 "쓰레기" 같은 순례자 메뉴라는 음식에 화가 나서, 그리고 더 이상 일만을 위해 살지 않고 순례자들에게 베풀고 살고 싶어서 큰 식당 최고 세프로 일하던 경력 다 때려치우고 여기에서 식당을 오픈하기로 했단다. 역시 사람은 다 자기 길을 간다.

미현과 요리사 아저씨, 어제 부르고스 알베르게 옆 침대에서 주무신 한국 공무원 아저씨 이렇게 넷이 식당에서 술을 마시며 한참 얘기하다 라트비아에서 온 유치원 선생님 아야가 합류하고, 며칠간 마주쳤으나 인사해도 받아주지 않던 험상궂게 생긴 스페인 남자와 결국 말을 트고 와인을 함께 마시며 신나게 떠들었다. 저녁 먹은 후에는 그가 준비하고 있는 식당에 오라 해서 가봤는데 내일 오픈 치고는 공사할 게 너~~무 많은 것. 원래 스페인은 대충 해 놓고도 오픈하나?


오르니요스 직전 마을 바에서 며칠 만난 무섭게 생긴 스페인 남자가 갑자기 우리말로 안뇽! 하고 인사해서 미현과 내가 눈이 동그래졌는데, 갑자기 왜? 이런 생각이 들었으나 어쨌건 같이 걸어 오르니요스까지 왔다. 알고 보니 자기는 짐이 13킬로라 무거워 힘들어 죽겠다며, 그래서 인사하기도 힘들었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내가 항상 앞장서서 가기 때문에 바에서 나온 이후 몇 시간을 미현과 함께 걸었다. 미현이 스페인어 할 줄 안다며 몇 마디 했는데 그걸 아주 배꼽 빠질 개그로 재연하는 바람에 다들 뒤집어졌다.

다들 통성명했는데, 그는 유독 자기 이름을 절대로 얘기해주지 않고, 한국에서 흔한 남자 이름 뭐냐 묻더니 철수! 라는 말에 자기 이름은 철수이고, 자신도 한국인 이라며 알베르게 식당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다. 빌바오 출신이라는데 40대 중반이고, 유머감각 풍부하고, 눈치도 빠르고, 언어감각도 좋은 사람. 자기는 갤럭시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핸드폰이라 생각한단다.

식사 후 아야와 철수가 체스를 뒀는데 첫판은 철수가 나머지는 아야가 이겼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여기 온 이후 걷기에 완벽한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열흘 넘게 왼쪽 새끼발가락 발톱이 빠질락 말락 아파서 절뚝거렸고, 나아갈 때 즈음엔 그 발가락의 위쪽에 물집이, 그리고 다음엔 뒤꿈치에 물집이 차례로 생겼고, 발을 덜 절뚝이면 오른쪽 고관절이 아파서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작은 물집 하나밖에 남지 않자 생리통으로 시달리고 있다. 생리통이 사라지면 또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른다. 그러니 완벽한 건강상태와 완벽한 날씨, 가벼운 짐 등등이 다 갖춰진 완벽한 날을 기다려 걷는다면 난 아직 출발도 못하고 있거나 겨우 하루 이틀 걸었을 것이다.

결국 상황이 좋아지면 하겠다는 건 미루겠다는 다른 표현일 뿐. 무언가를 하는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기로 한 일을 시작하고 상황에 상관없이 꾸준히 해 나가는 것이다.

어찌 되었던 꾸준히 뭔가를 한다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한 거 같다. 당장은 이뤄지는 게 없어 보이지만 쌓이면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비해 엄청난걸 얻게 된다.


원래 산볼까지 가려고 했었지만 미현이 발 상태가 좋지 않아 오르니요스에서 멈췄는데 산볼에서 기다릴 미레이&롤랑이 생각난다. 그들을 못 만난 대신에 신기한 한국인 요리사를 만나 그의 식당 및 집에도 가봤고 빌바오의 철수도 만났다. 항상 모든걸 가질 수는 없다. 포기하는 게 있어야 새로운 것, 다른 것을 가질 수 있다.



속이 좋지 않아 요리사 집에서 먼저 나와 자려고 누웠는데 미현은 아직도 오지 않았고, 잠자리는 역시 불편하다. 어제 하루 부르고스의 좋은 침대에서 잤다고 금방 몸이 아우성친다. 간사한 것이 인간의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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