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은 왜 갔을까

산티아고순례길에 왜 갔냐는 질문에 대해

by 크리스탈

작년 연말 회사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만두었다.

작년 가을 즈음부터 회사 내부 사정이 정말 심각해졌고 나의 안위 역시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으며 조금씩 마음의 준비를 했었는데, 실제로 사표를 내게 되니 기분이 또 달랐다.

걱정하는 눈빛의 가족들과 위로하는 지인들, 정신없는 연말 분위기 속에 올해를 맞았고, 잡생각을 잊고 싶어 중국어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한의원 가서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회사를 오래오래 다녔지만, 항상 어느 정도의 에너지가 유지되고, 적정 수준의 치료나 휴식 후 정상(?) 상태로 돌아오곤 했는데, 마지막에 다닌 곳에서는 몸이 완전히 망가져 버린 것 같았다. 물론 점점 드는 나이를 무시 못하겠지만, 마지막 5년은 지난 세월 동안 받은 스트레스와 챌린지를 모두 합한 것 이상의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받았고, 그걸 이기려고 혹은 잊으려고 내 몸을 더 혹사시키고-폭식 포함-살았던 것 같다. 건강진단 결과의 모든 수치가 나쁜 쪽으로 상하향을 한 것을 보고 더 다녔으면 어쩌면 쓰러졌겠구나 하는 위기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의사는 치료를 해 주면서 지난 세월을 털어버릴 시간을 가지라고 했다. 몸의 병은 마음에서 오는 경우가 많고, 몸으로 온 병증은 치료할 수 있지만 마음이 지속적으로 보내는 부정적 시그널과 에너지는 회복을 더디게 하고 다른 곳도 아프게 한다는 그야말로 동양철학적 조언.

그 조언이 아니더라도, 찌꺼기가 가득 쌓여 있는 듯한 내 마음을 비워내고 먼지까지 탈탈 털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했다. 회사를 관두어도 계속되는 관계들, 끝이 없는 생계에 대한 걱정과 조언이라고 던지는 오지랖에 지쳤고, 설상가상 능력 없는 실업자라는 자기비하감까지 마음에 무게를 더했다.

평생을 어떤 회사의 누구로 살다가 그 어떤 회사가 내게서 떨어져 나가자 이렇게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개인이 될 줄을 몰랐다. 직업란에 "무직"이라고 써야 할 때의 당혹감과 자괴감. 모든 중년 실업자들이 겪는 과정을 나도 겪고 있었던 것이다.


몇 달 여행을 가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달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런던에서 공연을 보며 지내도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탈리아 남부에서 낮잠과 파스타로 시간을 채우며 살아도 좋겠다고, 북유럽에서 자전거 타며 항구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날들을 가져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 모든 시나리오의 공통점은 내가 절대적으로 편하고 나 스스로가 절대적으로 통제 가능한 환경임을.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내가 살아온 세월이 무엇이었나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원치 않는 인연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인연을 끊는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관계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내 태도와 기준을 다시 정비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익숙하거나 편한 환경에서 나를 응석받이로 다독여주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내가 통제할 수 없고, 내가 절대로 원하지 않았던 환경, 끊임없이 한계를 인식하고 나 스스로가 대단치 않은 존재임을 깨달아 下心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생각하다 다다른 곳이 산티아고순례길이었다.

매일매일 25-30킬로를 걸어야 하고, 무거운 짐이 항상 내 어깨에 얹혀있고, 낯선 이들과 같이 씻고 자고 밥을 먹어야 하고, 더위와 벌레, 갈증과 피로에 시달려야 하는 길. 생각만 해도 너무너무 싫었다. 그중 제일 싫은 것이 낯선 사람들과 끝없이 마주치고, 사적인 공간 없이 부대껴야 하는 것이었는데, 평생 그런 일을 해 본적도, 상상도 해 본 적도 없어서 너무나 고민스러웠다.


이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서 온갖 핑계를 다 생각해 봤다. 요약하면 대충 다음과 같다.

1. 매일 그렇게 걸으면 힘들어서 무슨 생각을 하겠어? - 이건 맞는 걸로 판명이 났다. 다른 긍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2. 내 공간, 시간도 없이 사람들한테 스트레스 받으면 세상이 더 싫어질 거야-이건 일부 맞고 거의 틀렸다.

3. 난 더위에 약해, 두통과 탈수증에 못 견딜 거야-이건 틀렸다.

4. 그리고 고생은 고생일 뿐 다른 건 없어, 고생이 뭔가를 줄 거면 우리나라에서 고생하는 모든 분들이 다 성자가 되거나 성공해야지!- 이건 완전히 틀렸다.

5. 취업기회를 놓칠 텐데-이건 맞았음


이런 부정적인 생각에 반해 다른 생각들도 나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1. 이 길은 걷는 거 자체가 성취다. 내 생전 800킬로 언제 걸어보겠나

2. 파울로 코엘료도 걸었다

3. 내 주위에 걸어본 사람이 거의 없다. 특히 친구나 가족 서클에서 난 영웅이 된다ㅋ

4. 외국 친구를 사귈 수 있다 (있는 친구한테나 잘하지..)

5. 늙어서 큰 추억거리가 된다

6. 살아오면서 항상 제일 하기 싫은 일이나 두려운 일들이 가장 큰 교훈을 주었다

7. 두 달 이상의 긴 여행인데도 경비가 꽤 싸다

8. 이번이 아니면 스페인 가기 힘들다

9. 취업기회가 와도 떨어질 수 있는데 그러면 여행도 못 가고 취업도 안 되는 더블 루저가 되니 하나라도 건지는 게 낫다


결국 난 해야 할 이유가 더 많다는 합리적 근거로 가기로 결정했다. 내가 겪을 고생이란 결국 내년보다는 지금이 더 쉬울 것이고, 내가 얻을 무엇인가가 과연 있다면 빨리 얻을수록 좋다는 생각도 더해졌다.

그리고 그 결정은 세상에서 제일 잘 한 것 중의 하나가 되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피스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