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리-팜플로나

6/14 3일 차

by 크리스탈

점심 6.20

숙소 8.50

음료 2.50

순례자 디너 12.10

물 0.66


07:15에 출발, 4시 숙소 도착

가는 길에 물집 잡힌 왼쪽 새끼와 오른쪽 엄지 아래 발볼 칭칭 싸맸는데도 아파 죽는 줄 ㅠㅠ

설상가상 미현씨도 발목 인대 늘어나서 절뚝거리고 둘이 천천히 오다 보니 알베르게 마지막 손님이 됐고 우리를 마지막으로 completo(full) 사인을 내걸었다.


며칠 새 만난 길 위 친구들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 위로해 주며 가는 재미가 있다. 3일째 보니 이름 몰라도 얼굴을 익힌 사람들도 많고 줄잡아 스무 명 정도는 서로 알게 된 듯

특히 네덜란드에서 온 안드레와 모니크 부부는 너무 보기 좋은데 열심히 걷고 충분히 쉬고 쉴 때는 잘 먹고 양말 갈아신으며 발 말리고 하면서 물집 한번 없이 잘 가고 있다. 그러면서 힘내고 천천히 가라고 잘 쉬라고 항상 격려해 준다

숙소 와서 물집 터뜨리는데 프란체스카가 핸드폰 불빛을 비춰줬다. 인사 말고 해 준 게 없는 사이인데도.. (그녀와 남편은 론세스바예스에서 같은 컴파트먼트에 있었다) 너무 다정하고 착하다. 심지어 날라리 같은 아래층 침대 총각도 라이터 빌려주고 실을 끼워 놓으라며 충고해 주고- 핸드폰 울림만 없으면 참 좋을 아이인데..-어쨌거나 다들 서로서로 도와주는 분위기


숙소는 독일 파데 보른 Padeborn 시와 팜플로나 시 사이의 우호관계 수립을 기념으로 만들어져 독일인이 운영하고 있는데 독일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매우 깔끔하고 정확하며 배려 깊게 살피는 곳이다. 우선 사무실에 불러 앉힌 다음 레몬 물 또는 오렌지 쥬스 중 선택하라고 해서 음료를 주고, 여권을 달라해서 서류 작성을 매우 꼼꼼히 하는데 여권번호, 생일, 나이, 이름, 여권 발급처 등등을 장부와 이용신청서 양쪽으로 다 적고 신청서엔 본인 사인까지 받는다! 뭐 그렇게 많이 적는지, 놀랄 지경.

그리고 한글로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 써 달래서 써드렸다. Hermann & Gertraud가 부부의 이름인데 참 전형적인 독일 이름이다.


침대 배정해 주고 시설 안내를 해 주는데, 빨래는 밖에서 하고 빨랫줄도 밖에 있지만 건물 지하실 같은 내부에 널 수도 있고 심지어 짤순이도 있다! 손빨래를 하고 있으니 헤르만 할아버지가 와서 짤순이 사용법을 가르쳐 주셨다. 게다가 밥 먹고 오는데 그새 비가 와서 밖에 말린 빨래 걱정을 했는데 돌아와 보니 이미 바깥 빨래들을 모두 걷어서 내부에 널어두셨다. 세상에..

샤워실도 매우 좁지만 최대한 효율적 공간-샤워부스와 탈의 공간이 큰 한 칸에 나눠져 있음-활용을 하고 드라이어와 손세정제가 있으며 화장실 내부 벽에 콘센트까지 있다. 볼일 보며 충전해야 하는 급박한 사람이 있을 줄 어찌 아시고? ㅋㅋㅋㅋ

철제 침대도 엄청 튼튼하게 만들어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어제 수비리 공립 알베르게 휘청거리는 철제 침대에 비하면 이건 난공불락의 요새 수준. 침대 기둥 사이즈가 네 배쯤 돼서 거북스럽지 않다.

역시 독일 사람들.. 효율과 경제성, 실용성이 최적화되어 있는 쾌적한 공간으로, 앞으로 이런 곳에만 묵어도 괜찮겠다 싶다.


오늘 오후 팜플로나 직전 들렀던 카페에서 먹은 시금치 키쉬 너무 맛있었다.

내일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 여기는 오렌지주스도 바로 짜 주는데 오렌지가 두세 개는 기본으로 들어가고 2유로도 하지 않는다. 스페인은 음식이 전반적으로 싸고 맛있다.

오늘 저녁에 먹은 순례자 메뉴는 맑은 고깃국(meat broth), sole, 초콜렛 끼얹은 chou 였는데 다 너무 맛있었다. 특히 sole은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데 고소함과 신선함이 압권. 신선한 생선이 아니면 절대 못 나올 맛이며 얇게 입힌 계란옷 역시 얇고 고르게 입혀져서 식감을 풍부하게 해줬다. 단 생선 사이즈가 작은 건 좀 아쉬웠는데 다 먹고 나니 배가 너무 부른 거다! 대체 내가 뭐 먹었다고? 커피까지 추가 주문해서 마시고 나니 너무 만족스럽고 행복.

내일은 또 어떤 음식을 먹게 될까!?


그리고 오늘 숲길에 흔적을 남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키쉬를 먹고 나니 장에 신호가.. ㅠㅠ

그래서 식사하기가 부담스럽다. 내일은 아침식사 1시간 후에 출발해야지. 어제까지 길에 실례하는 사람들 측은하게? 한심하게? 봤는데 나 역시 별 다르지 않은 인간임을 깨닫고 겸허해졌다. 그래도 나도 역시 가끔씩 똥이나 싸지르는 별 수 없는 인간임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다.


미현씨는 며칠째 스페인 통신사가 안 잡혀 전화도 못하다가 내 전화로 sk랑 30분 넘게 씨름하다 겨우 전화가 됐다. 팜플로나 초입에서 전화를 한 터라 오늘 수비리에서 출발한 사람들의 후진이라 할 사람들 대부분을 통화시간 동안 기다리며 다 봤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알베르게에서 만남.


카미노 온 이후 빨래할 때마다 라만차가 생각난다. 산초가 알돈자에게 돈키호테의 서간을 전하러 가는 장면 ㅎ훈초랑 용용이 산초가 최고였지 ㅎㅎㅎ 그러고 보니 세르반테스 동네도 나중에 가봐야지. 그럼..


양 발목이 시큰거린다. 장딴지도 땡땡하고 오른쪽 고관절도 아프고.

일단 허세로 오긴 왔으나 삼십몇일 걷는 동안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지 잘 모르겠다.

문득 나 아니고 HK가 여기 왔으면 친구를 아마 이미 백 명은 만들었겠지 싶으며 난 여전히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이며 제대로 즐기지도 누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게 내 모습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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