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마감, 타인의 흔적
순례길 경험자들의 옷에 대한 의견은 각기 달랐다. 갈아 입을 옷과 입은 옷만 있으면 된다는 의견도 있고, 그래도 한 벌 정도 여분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최소한 양말과 속옷은 하나 정도 여유있게-그래봤자 전부 세 개-가져가야 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난 조금 더 가져갔다. 반팔티 2개, 긴팔티 2개, 바람막이1개, 경량패딩 1개, 겉바지 2개, 잠옷바지 1개. 속옷은 3세트, 양말도 3켤레. 너무 많이 가져간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하루이틀 지날 수록 내가 옷을 많이 가져왔다는 후회가 들었다.
입은 옷과 입을 옷, 그렇게 딱 두 세트면 되고, 속옷과 양말은 하나씩만 더 있으면 됐다. 한 벌을 입고 걷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샤워한 뒤, 새 옷을 갈아 입고 땀에 절은 옷을세탁한다. 갈아 입은 옷을 입고 자고, 그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그 차림새로 걷는다. 그리고 똑같은 패턴 반복.
스페인은 밤에 은근 추워서 침낭이 필요한 시기가 의외로 길었고, 긴팔 옷을 입고 자면 밤에 덜 추운 장점도 있었다. 그러니 반팔티 2개는 전혀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물론 낮에는 덥지 않냐 하지만, 워낙 햇살이 강해서 얇은 긴팔 상의를 입는게 오히려 피부 보호가 되어 낫다.그렇다고 타지 않을까? 설마.. 옷감 조직 사이로 햇살이 들어와서 한달 지나고 보니 속옷 자국이 뚜렷하게 남았다. 스페인의 태양 아래서 도망 칠 방법은없다.
새벽에 알베르게를 나서서 두 시간이면 속옷까지 푹 젖는다. 그 옷을 입은 채 몇 시간 더 걷는다. 오후 2-3시경 그날 묵을 마을의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나서 해야 할 일은 반드시 빨래. 옷이 그것 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루라도 옷을 세탁하지 않고 가져가면 맨발에 운동화 신고 다섯 시간 이상 돌아다니다 벗었을 때 나는 냄새가 난다. 땀을 머금어서 냄새가 더 심하고, 무겁기도 하다.
주로 손빨래를 한다. 비누 하나면 샤워부터 빨래까지 오케이. 초반에는 1회용 샴푸를 쓰기도 했는데, 역시 순례길은 뭐든 간단한게 최고. 가지고 갔던 1회용 샴푸 다 쓰고 나서는 비누 하나로 샤워에 빨래까지 했고, 비누를 다 쓰고 나서는 바디&헤어 클렌저를 사서 빨래를 했다.
6월 중순 넘어가면 빨래가 잘 마른다. 대충 물기를 짜서 널어 놓으면 강한 햇살과 바람에 저녁 먹고 올 때 쯤이면 – 두세시간정도?- 기분 좋게 말라 있다. 빨래집게를 꼭 집어서 널어야 빨래가 바람에 날려가 바닥에 걸레처럼 팽개쳐 지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알베르게에는 왠만해서는 빨래집게가 있는데, 난 혹시나 하고 열 개를 가져갔다. 빨래집게가 있어도 다른 사람이 이미 사용하고 있는 경우에 내 것을 꺼내 썼는데, 알베르게의 빨래집게가 부실한 경우가 많아서 언제부턴가는 빨래하러 갈 때, 빨래집게까지 가지고 가서 내 빨래는 꼭 그걸로 집어놓게 됐다. 빨래집게가 없을때는 옷핀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하는데, 옷핀도 가져가 사용해 보니 아무래도 빨래집게가 편하고, 부피는 옷핀이 거의 안나가는 각각의 장점이 있다.
빨래를 할 때는 거의 무념무상. 옷을 적시고 비누칠 하고, 몇번을 헹구고, 짜서 너는 그 모든 과정이 명상에 버금간다. 그렇게 머리가 텅 비어버릴 수가 없다. 어떤 행위 하나에 깊이 몰두하면 아무 생각이 안난다는 것을 순례길에서 가장 하기 싫고 힘든 일을 하며 깨달았다. 비누칠이 잘 되었는지, 물에 충분히 헹궜는지, 물기 없이 잘 짰는지, 과정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파란 하늘 아래 죽 쳐진 빨래줄에 비누냄새 나는 빨래를 걸어 놓으면, 세상 어떤 일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뿌듯함이 느껴진다. 오늘의 공식일정은 끝! 하는 생각과 함께.
매일 손빨래를 하기 때문에 습관이 되지만, 가끔씩 너무 피곤한 날은 주위 사람들과 돈을 모아 세탁기와 건조기를 쓴다. 보통 세탁기 사용에 2~4유로, 건조기는 3~5유로를 받는다. 합치면 5~9유로가 들기 때문에 둘 또는 셋이서 조금씩 돈을 내고 한번에 세탁을 한다. 난 같이 걷던 미현과 가끔씩 세탁기,건조기를 사용했는데, 다른 사람-특히 남자가 같이 세탁하자고 하면 주로 거절했다. 왠지..내키지 않았다. 남자, 특히 서양남자의 빨래가 내 빨랫감과 섞이는 것이 너무 싫었다.
어느날 혼자 걷던 혁이를 만났다. 여친에게 보여주기 위해 매일 여정을 타임랩스로 찍어가며 걷는 혁이가 같이 세탁을 하자고 해서, 아무 생각없이 그러기로 했다. 세탁기에 넣을땐 모든 빨래가 돌돌 뭉쳐져 있었고, 그대로 던져 넣었기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건조기를 안쓰고 마당에 널기로 했는데, 혁이가 자기가 널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때 뭣에 씌었는지 나도 미현도 둘다 그러라고 했다. 빨래를 널고 온 혁이가 대뜸 정신없이 웃는 것이다. 얼굴은 빨개져서. 왜 그러냐 했더니, 두 누님들 속옷을 너는데 옆에서 쳐다보더라며, 자기가 변태가 된 느낌이었다나. 셋이 포복절도했다. 어머니 속옷도 못 봤는데 오늘 처음 만난 누나들 속옷을 널었다며 인생의 큰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했다. 나보다 조금 더 뻔뻔한 미현은 다 그게 인생공부고, 여친 만날 때 당황하지 말라고 미리 연습한거라고 우겼다.
여러 사람의 빨래를 건조기에서 함께 말리면 항상 무언가 하나씩 없어진다. 언제부턴가 양말 한 켤레가 보이지 않았고, 또 언제인가는 속옷 한장이 사라졌다. 도대체 언제 없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는데, 세탁기와 건조기를 사용했던 날들 중의 하루겠지.
나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흘리거나 잃어버리고 다닌다. 부르고스에서 만난 엘바 아줌마는 우리 바로 직전에 건조기를 사용했는데, 우리 옷을 건조기에 넣으려고 보니 속옷이 하나 남아 있었다. 부르고스 알베르게는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 수준으로 큰데, 어디서 아줌마를 찾아 속옷을 전해줘야 하나 막막했다. 하지만 순례자의 배낭 속에 들어있는 옷이란 서바이벌 수준의 단촐함인지라 티셔츠 한 장, 양말 한 켤레가 소중하기 때문에 미현이 속옷을 들고 침대마다 찾으러 다녔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인 아줌마는 저녁을 늦게, 오래 드시는지 돌아오시지 않고, 결국 만나지 못했다. 미현은 그 속옷을 레온에 도착할때 까지 들고 다녔다. 순례길을 매년 조금씩 걷는 엘바 아줌마의 올해 목적지가 레온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결국 그날 이후로 한 번도 못 보고 속옷만 남았다.
미현과 가끔 얘기하며 웃는다. 우리 속옷을 널며 혁이는 진짜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엘바 아줌마의 초록색레이스 속옷의 나머지 한쪽은 쓸쓸하겠다, 내 양말은 누가 신고 있을까, 버렸을까.. 등등
길에는 순례자들이 벗어놓고 간 옷들이 많다. 티셔츠, 스웨터, 점퍼도 있고, 헤어밴드, 양말도 종종 눈에 띈다.
누군가는 무거워서, 귀찮아서 벗어놓고 갔거나, 다른 누군가는 다시 오기를 기대하며 일부러 벗어 두고 갔을 것이다. 그리고 알록달록한 옷들은 다음에 걷는 순례자들이 갈림길에서 헤맬 때 눈에 번쩍 띄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알베르게 빨래줄에서 펄럭거리는 빨래들이 먼 길을 걸어 온 흙투성이 순례자들에게 쉴 곳을 알려주는 반가운 표식이 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