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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리스탈 Nov 01. 2016

배려의 의미

평양감사도 제가 싫으면

D사 우리팀 초기 멤버 둘 중 영업에서 온 ㄴ차장은 세심하고 꼼꼼하며 잔정 많기로 유명했다.

어찌나 꼼꼼한지 말을 할 수 없었는데 예를 들어 몇년 전 일이 기억 안나 물어보면 항상 관련된 과거 메일들과 업무파일을 빠짐없이 즉시 보내 줄 정도였다. 덕분에 왠만큼 좋은 기억력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나도 가끔씩 도움을 받기도 했고, 새 멤버가 올 경우 팀 공통의 업무 인수인계 파일과 자료들이 완벽하게 전달되었다.

게다가 술을 좋아하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해서 자신의 네트웍을 활용, 내가 회사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고, 팀이 어려울 때나, 내가 힘들 때나 항상 내편을 들어주었다.


함께 2년반쯤 지냈을 때 회사 경영환경이 너무 나빠져 팀원 몇명을 영업부서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 왔다. 누구를 보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사업부문의 헤드로 옮긴 이전 보스와 식사를 하다 ㄴ차장을 그 사업부 마케팅팀장으로 보내자는 이야기를 했다. 당시  그 사업부는 비즈니스가 자리잡고 커져가던 때였는데 보스는 휘하의 마케팅팀장이 마음에 안들어 팀까지 없애버린 초유의 상태였다. 누군가 팀에서 빠져야 한다면, ㄴ차장을 팀장으로 보내는 것이 보내는 쪽 모양새도 좋고, 보스 역시 다시 마케팅팀을 만들 명분도 생기니 좋겠다 생각해 서로 뜻이 맞았다. 그래서 흔쾌히 오케이 된 것이다.


그런데 ㄴ차장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 사업에 대해 잘 모르는데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모르겠으며, 팀장으로 팀을 나가는게 모양새 좋다하지만 자신은 자리욕심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보통 차장이 되면 빠른 경우 팀장을 하는게 드문 일도 아니고 회사가 어려울때 팀장이 아닌 담당부장으로 팀에 있으면 정리대상  우선순위에 오르게 되므로 어떻게 하든 팀장을 하려고 하는게 일반적이다. 특히 회사 사정이 나빠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후자의 케이스가 더 걱정되는 관계로 ㄴ차장의 경우 확실한 자리가 있으니 보내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설득하기를 몇번, ㄴ차장은 회사를 그만둬야겠다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 이해가 안됐다. 왜 자리가 있는데 거절하고 스스로 관두려 하는지 당시의 나로서는 이해불가.


결국 ㄴ차장은 몇개월 휴직을 했고 복직 후  몇년 전 있었던 영업부서로 재배치 받았다. 나와의 관계는 영영 끝이 났다. 복직 이후 만날 때마다 떨떠름한 얼굴로 가벼운 목례만 하거나 아예 고개를 숙이고 모른척 지나가 버리기를 몇 번. 나도 지쳐서 반응을 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나를 원수 보듯 하는 그 사람에게 섭섭함이 많이 들었고 왜 그러는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회사를 관두고 나서 몇십일 길을 걸으며 오래오래 곱씹고 생각한 결과 겨우 ㄴ차장의 마음을 조금 짐작할 수 있었다.

ㄴ차장 입장에서는 내가 자신을 팀에서 쫓아내려 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 같다. 팀장이니 승진이니 모두 팀원 커리어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내가 욕 먹지 않고 자신을 나가게 하려는 핑계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이 퇴사 이야기까지 했음에도 다른 팀으로 가라고 한 나는 본인을 사지로 내 몬 것 이상 아닌거다.

그때 ㄴ차장의 마지막 초강수였던 퇴사 카드에도 전배에 대한 의지를 철회하지 않은 것은 가장 큰 실수였다. 그렇게나 간곡히 자리욕심 없다, 팀에 남고 싶다 몇번이나 얘기했는데 난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답답하고 미웠을까.


배려는 상대가 기꺼워해야 배려이다. 그 사람의 미래를 걱정하는 내 마음은 정말 순수했지만 본인의 의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나는 진짜 배려를 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ㄴ차장이 계속 팀에 남아 있다 회사를 떠나게 됐다 하더라도 난 최선을 다했으니 미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내가 그렇게나 고집을 피울 일이었을까? 너를 위해서라는 독단으로 마음에 상처를 주고 영영 관계가 끝장나게 만든게 배려의 결과일 수 있을까?

부모님들이 자식한테 너 위해서 이러는거라며 무리한 요구를 하시고 자식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 것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 사람에게 미안하다. 진심으로. 어느 하늘 아래 잘 살고 있기를 바라며 나같이 우둔한 배려지상주의자에게 다시는 상처입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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