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엔테 라 레이나-에스테야

6/16 5일 차

by 크리스탈

커피 2.7

점심 5.0

저녁 10.0

식료품 7.68

숙소 6.0


새끼발가락이 퉁퉁 부어서 걷는데 너무 고통스러웠던 하루

억지로 22킬로를 걸어왔는데 놀라운 것은 너무 천천히 걷다 보니 풍경 구경을 제대로 한 것. 경치 제대로 감상 못하고 열심히 걸었던 지난 며칠이 안타까울 만큼 예쁜 풍경이었다.

밀이 노랗게 익고 밀밭 사이 빨갛게 숨어 핀 양귀비와 길가의 대형 유채꽃과 보라색 엉겅퀴, 그 외 노랗고 파랗고 진분홍의 수많은 꽃들. 그리고 줄지어 심은 포도나무가 멋진 산비탈 포도밭.

어제 안보이던 모니크와 안드레도 보고, 리바도 와서 걱정해 주고, 프란체스카도 틈틈이 만날 때마다 걱정해 주고. 마음이 뭉클한 하루

발가락 하나 아픈 게 이렇게 온몸을 힘들게 할 수 있는지 놀라운 하루였다. 걸을 때마다 아파서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병구의 대사가 계속 떠올랐다.


미국에서 온 엄마와 아들, 두 딸들의 일행이 나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나갔다. 물어보니 가족여행이라고 했다. 부러웠다. 나도 아직 부모님이 힘이 있을 때 이런 여행을 했어야 했는데.. 이제 너무 늦었다.


에스테야에 도착해서 알베르게 무니시팔 투숙. 겨우 며칠 알베르게에 잤다고 이제 도미토리 숙소에 묵는 거 아무렇지도 않다. 훌렁훌렁 벗는 양인들도, 엉망진창인 방도 그러려니 한다.

와이파이 연결하니 미현씨한테 카톡이 와 있었다. 오바노스까지 왔다고 내일은 에스테야까지 온단다. 그리고 메일을 여니 잡 오퍼가 와서 지원하라라는 메일이 왔다. 왜 나 없을 때 다들 이래..ㅠㅠ


아픈 몸을 추슬러 겨우 씻고 식료품 사러 시내 슈퍼에 다녀왔다. 그새 내린 비+우박 때문에 엄청 추워서 엄마한테 빌린 경량 패딩 꺼내 입었는데 그래도 추웠다. 안 갖고 왔음 어쩔 뻔했는지. 유리에 비친 내 몰골이 아주 거지가 따로 없었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에 웃음이 난다 ㅎㅎㅎ


*수퍼쇼핑-물, 에스테야맥주캔, 칩스, 휴지, 살구요구르트, 오렌지주스, 천도복숭아, 일본식 인스턴트 죽, 컵라면, 요구르트, 인스턴트죽과 과일은 내일 아침으로 샀다. 오렌지주스는 물 대신 마실 거고 저녁 먹고 키친에서 맥주와 함께 칩스 먹으려고 했는데 저녁식사가 길어지며 결국 가방 속으로..


숙소 옆 식당 가니 안드레와 모니크가 있었다. 합석하게 해 줘서 순례자 메뉴 시켰는데 오보베지인 안드레가 시킨 렌틸 수프를 내 전체인 줄 알고 먹어버린 바람에 안드레는 스파게티를 하나 더 시켜 먹었다. 아 미안해.

식사 중 대화는 너무 좋았다. 두 사람은 따뜻하고 열린 사람이란 느낌이 있었는데 역시 그랬다. 네덜란드 한 은행의 financial advisor라는 안드레는 여행 끝나면 회사 관두고 life coach로 직업을 바꿀 거라 한다. 그리고 그의 나이는 무려 53! 모니크는 50! 아주 놀랐다. 훨씬 젊은 줄 알았는데.. 사실 샤워 기다리는 모니크의 등이 굽었길래 나이보다 빨리 등이 굽었네 했는데 실제 나이가 많았던 거였다. 와우.. 결코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 그들의 비법은 착한 마음 씀씀이일까?


왜 왔냐, 직업 뭐냐 등 질문들에 회사 관두고 뭐하고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러 왔다고, 내일은 어제보다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등등 얘길 했는데 둘 다 그런 쪽으로 마음이 깊었다. 고마운 사람들 이야기를 하며 모니크는 울었고 안드레도 눈물이 글썽였다. 얼마나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매우 외향적인 모니크는 자신의 마음이 표면적 친절에서 더 깊어지길 바란다고 했고 안드레도 사람의 진심을 느끼고 변하고 있다며 다른 사람도 그렇게 변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안드레가 나는 보통 아시아인들과 좀 다르게 솔직하다고- 나이, 가족, 일 등등을 다 얘기해 줬으니까-해서 보통 아시아인들은 체면 차리고 예의 중시하고 속을 까는걸 무례하다고 생각한다고, 하지만 좀 친해지면 잘 지낸다고 해줬다. 그리고 한국에선 나이에 따른 위계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얘기해 줬고. 일본인들은 친해져도 거리감이 항상 있다고 아마 그럴 거라고 했다.

참, 안드레는 녹차, 특히 일본의 센 말차를 좋아한다고 했다. 한국에도 좋은 녹차 많다고 했지만 그가 구할 수 있겠나 말이지 ㅎ 돌아가면 한 통 보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녁 먹고 9시쯤 돌아와 한국에서 가져온 카미노 배지를 하나씩 줬다. 별거 아니지만 한국어라고 하니 오~ 하며 감사해했다.


발 물집 정리하고 있는데 안드레에게 도움받은 미국인인듯한 양아치 스멜의 젊은 남자애가 약 샀냐고 물어보길래 없더라 했더니 자기도 못 찾고 스투피드 밴드만 샀다고. 아 진짜 어떻게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렇게 양아스러운지..

어려서 그렇겠지 싶다가도 평생 양아치로 살지 않을까 걱정.. 별걱정을 다! 그리고 이 걱정은 역시 쓸데없는 것이었음을 한참 뒤에 깨닫는다.


2층 침대에 오르니 침대 쿠션이 의외로 괜찮다. 귀마개를 하고 누워 있으려니 만감이 교차했다. 갑갑해서 귀마개 못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 귀마개 하면 잘 잔다. 사람은 역시 환경에 적응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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