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엄마가 되는 길
딸은 고2 때 내려놓은 붓을 다시 들었다. 그림이 좋아 시작했는지 미래가 두려워 시작했는지 모른다. 그저 열심히 그림 그리는 딸이 안타깝고 대견했다.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는 듯한, 창작보다는 규칙이 있는 입시 미술.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못해 답답할 줄 알았는데 잘 참아냈다. 갑자기 미대를 결심한 딸은 숨 쉴 곳이 도화지밖에 없었을까. 작품을 보여 줄 때마다 감탄이 흘렀다. 혼을 갈아 넣었다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이젤 앞에서 몇 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으려면 힘들었을 것이다. 몇 달 뒤 높은 의자에 걸터앉아 붓을 들고 싸우던 딸의 허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림 그리는 동안 제대로 허리를 펴지 못했는지 디스크 진단을 받고 시술받기 위해 하룻밤 입원했다. 코로나로 혼자 입원해야 하는 딸이 안쓰러웠다. 입원시켜 놓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는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사자는 대수롭지 않다. 오히려 집 떠난 하룻밤이 즐거운 느낌이다. 간호사와 웃으며 대화하는 미소를 보며 처음 만난 낯선 사람에게 샘이 났다. 나에게도 편하게 웃어주면 좋겠는데. 엄마라는 존재가 큰 산이 아니라 바람 앞의 모래 같다. 의지할 정도로 든든히 지켜주지 못해 늘 미안할 뿐이다.
다음 날 병원으로 가는 길. 주차장에 주차된 차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시술했으니 차로 데려오면 좋을 텐데. 차도 있고 면허도 있는데 용기가 없다. 오래전 아이들을 데리고 행사에 다녀오는 길이였다. 차가 막혀 지루할 때 잠시 딴생각을 하다 내 몸짓에 깜짝 놀랐다. 머리가 핸들에 닿는 느낌이 드는 순간 남편이 기어를 움직여 겨우 멈췄다. 졸음운전이었다. 남편은 브레이크가 밀린 줄 알았는지 괜찮냐고 물었다. 내 실수를 감지하지 못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졸음운전을 알았다면 잔소리가 찐득거리게 달라붙었을 테니. 그날 겨우 집에 도착한 뒤로 운전대를 잡지 못했다. 멀미가 심해 차만 타면 졸던 내가 불안했다.
“차 가져오려다 그냥 왔어. 택시 타자.”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어떻게 타. 무서워!”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서운했다. 억지로 떼라도 쓰면 운전대를 잡을 마음이 있는데…. 사실 운전이 다시 하고 싶었다. 강요에 등 떠밀려서라도 시작하고 싶었는데 딸은 한사코 말린다. 이제는 멀미도 안 하는데. 딸이 하지 말라는 일은 하지 말아야지 하며 마음 접었다. 말씨름이라도 하고 나면 나는 무거운 마음 주체하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쉴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수시 시험 일정이 잡혔다. 서울부터 충청까지. 장장 4시간 동안 꼼짝 않고 앉아 있어야 하는 실기시험이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캐리어 끌고 시험 보러 다니는 모습을 떠올리자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허리도 아픈데 몇 시간씩 대중교통을 이용하자고 말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첫 번째 장소는 대중교통으로 약 2시간이 걸리는 곳이지만 차로는 30분이면 충분해서 우린 고민 끝에 택시 타기로 했다.
시험 전날, 남편의 거친 말로 무거워진 속을 비우기 위해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내 행동에 반대가 심한 남편은 딸의 행동도 고이 보지 않았다. 쯧쯧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려 한마디 했더니 역시나 화살이 날아왔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걷고 또 걸을 때 전화가 울렸다.
“엄마! 내일 어떻게 갈 거야?”
“택시 타고.”
“엄마는 나한테 관심이 없지?”
뚱딴지같은 말에 머리에 지진이 인다. 무슨 말을 듣고 싶어서….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하다 물었다.
“엄마가 운전하는 차 탈 수 있어?”
“응”
짧은 대답 뒤 뚝 끊긴 전화. 마음이 바빠졌다. 남편에게 전화 걸어 상황을 설명하니 철이 있네 없네 하며 한숨이 쏟아졌다. 딸이 역할을 주었는데 눈치만 볼 수는 없다. 우유부단하지 말고 확실해지자 다짐한 뒤 말했다.
“나 연습할 테니 옆에만 있어 줘!”
인생은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좋은 일이 생겨 기분 좋을 때도 늘 문제가 따라왔다. 문제 속에서 한발 물러설 때 비로소 기회가 다가왔다. 예전에는 문제를 두고 안절부절못했는데, 뒤로 물러서니 시야가 넓어져 마음이 안정되었다.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어떻게 타냐며 질색하던 딸. 갑자기 날아오는 말에 한발 물러섰다. 하고픈 말을 멈추고 듣고 싶은 말을 생각했다. 그 물러섬이 나를 다시 운전대로 인도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조수석에 잠든 딸을 바라봤다. 자고 싶다며 내가 심심할까 봐 음악을 틀어주는 세심함. 다른 사람 입장까지 헤아리고 싶은 속 깊은 아이라서 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야 이 아이가 더 편해질 수 있는지. 방법이 절실해지고 노력이 더 간절해지는 순간마다 한발 물러섬으로 지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