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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다미 Oct 03. 2024

그림자가 사라지는 시간

유연함의 힘

가을바람을 느끼며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자 석양이 내 등 뒤에서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엿가락처럼 쭉 뻗은 그림자가 도로 위에 길게 누었다. 저 멀리까지 이어진 그림자를 보면서 추억을 떠올렸다.    


어릴 적 우리는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려고 온 동네를 뛰어다녔다. 내 그림자를 누군가에게 밟히면 억울했지만, 친구의 그림자를 밟았을 때는 그저 신이 났었다. 그때는 왜 그 놀이가 그렇게 즐거웠을까? 넘치는 에너지를 쫓고 쫓으며 발산했던 우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알게 되었다. 무언가를 쫓는 일이 에너지를 소비할 뿐임을. 그리고 다른 사람의 길이 아닌 내 길을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잠시 사이 그림자는 더 길게 늘어났다. 가을빛이 감성을 자극한 걸까?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누구든지 쉽게 밟고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림자를 밟히지 않게 보호하고 싶어졌다. 그때 자동차가 빠르게 지나갔다.


'아차!' 하는 순간, 그림자는 구부러져서 차 보닛을 타고 넘더니 다시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내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림자는 밟히지 않았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네가 구부러질 수 있었기 때문이구나!’ 수없이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모습을 봐왔음에도 왜 나는 늘 그림자가 밟힌다고 생각했을까? 


집으로 오는 길, 아이들처럼 그림자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전봇대 그림자에 발을 들이밀고, 돌멩이나 길가의 쓰레기 그림자에 손을 얹어보았다. 역시 그림자는 부드럽게 구부러졌다가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림자가 유연함을 지닌 덕분에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며 길을 찾는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내 머릿속은 엉뚱한 생각이 자주 드나들었다. 책상에 앉으면 미꾸라지 같은 잡생각들이 나를 휘감는다. 머릿속을 동동 떠다니는 생각들은 비눗방울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한 번 떠나간 생각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떠나간 생각을 붙잡으려 애썼지만, 이제는 그림자를 보며 배운다. 매달리지 않고 놓아주는 것이 진정한 유연함이라는 것을.


밤이 깊어지자 그림자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내 그림자는 지금 어디 있을까?’하고 궁금해졌다. 침대와 내 몸 사이 어딘가에 숨었을까? 그림자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지만, 내일 아침 빛이 비치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내일 아침, 다시 그림자를 바라볼 여유가 있을까? 아니면 여느 때처럼 바쁜 하루 속에 그 존재를 잊고 시작할까? 내일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만큼은 그림자가 전하는 메시지를 기억하며 조금 더 여유롭게 살아가기로 했다. 그림자가가 사라지는 이 시간, 나는 내일을 기대하며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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