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엄마! 할머니 식혜 만드실까?"
"글쎄"
식혜를 좋아하는 아들의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한 나는 불량 엄마이다. 십몇 년 전, 그러니까 신혼 초에 아이들이 어렸을 때 딱 한 번 식혜 만들기 도전을 했었는데 실패했었다. 당시는 인터넷 정보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과감하게 포기하고 다시는 만들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한결같다. 말한 것을 지키려는 성격이 강하다. 내가 포기한 덕분에 아들은 명절에 시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실 때만 맛볼 수 있었다. 나는 명절 준비를 열심히 도와드리지 않았기에 만들어달라는 부탁도 못하고, 여쭤보지도 못해 아들의 질문에 얼버무릴 뿐이었다. 지난 설에도 다행히 시어머니께서는 식혜를 만들어주셨고 아들은 맛있게 먹었다.
십 년을 넘게 산 동네인데 인맥에 가뭄이 들었었다. 아이들 나이에 따라 만나는 사람이 바뀌다가 직장 다니면서 멀어지게 되었고, 회사를 그만두고 난 뒤로는 동네에서 사람을 사귀기 어려웠다. 어쩌면 혼자 노는 것에 심취해서 사람 사귀기를 거부했는지 모른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매일 가방 메고 카페로 출근해서 혼자 놀았다. 그러다 우연히 카페 사장님과 안면이 트였고 전화번호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몇 시간을 앉아있어도 눈치는 커녕 간식까지 챙겨주시던 사장님은 건강 문제로 카페를 다른 분에게 넘기셨고, 이후 이상하게도 발길이 향하지 않았다. 걷는 시간을 빼고는 하루 종일 방에 콕 처박혀 살았었다.
몇 달이 흘렀고 여쭤볼 일이 있어서 카톡을 보내자 반가워해주셨다. 약간은 엉뚱해 보이는 내 이야기를 재밌다고 해주시는 사장님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다시 만나고 가끔 식사도 같이 하는 인연이 되었다.
"식혜 좋아하세요?"
며칠 전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했다. 잘 받아야 하는 것을 알지만 아직은 누군가에게 뭘 받는다는 게 어색하기도 하다. 좋아한다고 말해야 하나, 싫어한다고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들을 앞세웠다.
"아들이 엄청 좋아해요."
내 대답을 듣고 음식을 쉽게 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한 번 만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어제는 이상하게 한 일도 없이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새벽부터 부산스러웠지만 뭘 했는지도 모르고 멍하니 있을 때 바쁘냐는 톡을 받았다. 할 일이 있다고 말씀드리자 식혜 만들었다며 아들 일찍 먹이고 싶다는 말씀에 찾아간 나는 깜짝 놀랐다. 한두병 주실 거라 생각했는데 네 병이나 받았다. '식혜 만드시느라 얼마나 애쓰셨을까' 감사한 마음에 그냥 오기 죄송해 차 한잔 하자고 했지만 바쁜 사람 시간 뺏기 싫다며 발걸음을 돌리셨다. 돌아오는 길 들고 가기 무거워서 어쩌냐고 마음 써주시는 분의 말씀에 자꾸 엄마 생각이 났다. 자꾸자꾸 주시면서도 부족해서 미안하다 하시고 안 힘드냐고 걱정하시던 엄마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래서일까 맑고 투명한 식혜를 들고 오는 길 이상하게도 무겁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뒤 냉장고에 넣어두자 가난한 냉장고가 꽉 채워져 보기 좋았다. 아들이 맛있게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바쁜 오후를 보낸 뒤 오늘 아침 냉장고를 열었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식혜가 보였다. 평소 같으면 너무 달아서 먹지 않았을 텐데 깨끗한 색이 보기 좋아서 한잔 따라 마셨다. 달지 않고 깔끔한 맛에 반했다. 딱 내가 좋아하는 맛이었다.
인연이란 참 신기하다. 힘들다 할 때는 힘들게 사는 사람들만 주변에 있었는데 매일 감사함을 생각하며 살기 시작한 뒤로는 생각이 가벼운 분들과 이어지고 있다. 마음 넉넉한 분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행복을 느낀다. 이것이 피그말리온 효과일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더 열심히 살기 위해 노력한다. 감사함을 기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