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나밖에 몰라서

시아버지의 1주기

by 청크리

시아버지의 1주기가 지나갔다. 달력을 넘기며 1년이라는 시간을 가늠해 본다. 갑작스러운 이사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던 시간들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 세 식구의 일상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혈연을 떠나 로키에게 한없이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던 할아버지. 돌이켜보면 감사함보다 죄송함이 더 컸던 분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며 그 기억마저 점점 희미해져 간다. 그래서 문득 죄송한 마음이 차오를 때가 있다. 애써 슬픔을 길어 올리지 않는 내 모습이 시아버지를 향했던 나의 진심을 배신하는 것만 같아 가슴 한구석이 쿡 찔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내는 이 ‘생존' 이야말로 그분을 가장 온전히 애도하는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께서 평생 보여주셨던 치열했던 성실함과 열정을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기어이 살아냄으로써 증명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


할아버지가 떠난 지 1년. 아이의 세상에서도 할아버지는 서서히 멀어지고 있다. 예전의 로키는 길을 걷다가 비슷한 체격과 분위기의 할아버지를 마주치면 홀린 듯 다가가 손을 잡으려 하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당황하며 아이를 말리기에 바빴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로키는 더 이상 낯선 이의 소매를 잡아끌지 않는다. 비슷한 분을 마주쳐도 대부분 덤덤히 지나치는 아이의 그 조금은 무심해진 뒷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이 변화는 단순히 기억이 지워진 것이 아니라 아이 나름의 방식으로 할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고. 무작정 다가가던 손길을 거두고 타인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걷는 법을 알게 된 로키. 그것은 아이가 슬픔의 스펙트럼을 통과하며 배운 할아버지와의 조용한 작별 인사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리는 할아버지를 완전히 잊은 것이 아니라 각자의 속도로 그 빈자리를 견디며 성숙해지고 있는 중인 것 같다. 모르는 할아버지를 향해 뻗던 로키의 손은 이제 내게 그네를 타러 가자며 "그 그!" 하고 세상을 향해 방향을 가리키는 손이 되었다. 매일매일 속으로는 수천번씩 흔들리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어느새 우리에게는 이전보다 더 단단한 일상이 들어앉았다. 그렇기에 할아버지께서 남겨주고 가신 것은 슬픔이라는 짐이 아니라 우리가 다시금 평온하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작고 다정한 안온함임을 1주기가 지난 오늘에야 비로소 조금은 깨닫는다. 오늘도 로키는 할아버지를 닮은 뒷모습을 스쳐지나 저만의 속도로 앞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다. 옅어진 슬픔 대신 단단한 걸음걸이로 우리는 오늘도 각자의 계절을 무사히 건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