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은 좋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야 하는 부담 없이 밤늦게까지 놀 수 있어서 좋고, 주말여행을 시작하는 날이라서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언제부터인가 ‘불금’이란 말을 사용해 가며 토요일보다 금요일에 노는 것을 더 즐기는 듯하다.
‘Thanks God, it’s Friday’
를 외치며 금요일부터 주말을 즐기는 서양인들에게 금요일 밤은 그야말로 파티의 밤이다. 그런데 이런 서구 기독교 문화권에서도 1년에 단 하루 기쁘게 즐기지 않고 애도하며 보내는 금요일이 있으니, 바로 부활절 이틀 전의 금요일이다. 이날은 기독교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한 날로, 신자들은 파티는커녕 한 끼를 굶고 육식을 금하며 예수의 고통에 동참하고 애도하려는 노력을 한다. 그런데 그들은 부활절 이틀 전, 이 금요일을 “Good Friday”라고 부르며 기념한다. 자신들이 믿는 신이 참혹한 죽음을 당한 날. 가장 소중하며 유일하게 믿었던 세계가 무너진 끔찍한 날인데, 왜 하필 이 날을 Good Friday, ‘좋은 금요일’ (한국에서는 좋은 금요일이 아니라 성(聖)금요일이라고 부른다)이라고 부르는 걸까?*
답은 그날로부터 사흘 뒤에 벌어진 인류 역사 최대의 사건에 있다. 분명 스승의 죽음을 확인했고 무덤에 묻기까지 했는데, 일요일에 다시 가보니 시체가 사라지고 부활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다니… 말도 안 된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고,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는 예언자 중 한 사람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신이 된다.
부활은 반드시 죽음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예수의 죽음이 아무리 가혹하고 무서운 일일지라도 부활의 기적을 위해서 반드시 일어났어야만 했기에, 이 끔찍했던 금요일은 좋은 날, Good Friday가 되었다.
몇 년 전 나는 연구원 동기들과 함께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하는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 전 1주일간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읽으며 왜 변해야 하는지, 변하기 위해서 어떤 습관들을 버려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마흔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를 읽으며, 나도 구본형 선생님(저자)처럼 ‘하루하루가 빛나는 유혹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도 마흔세 살. 나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변화와 새로운 시작을 지금껏 머리로만 이해했지, 가슴과 몸으로 받아들여 생활 속에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장례식 전과 똑같은 나쁜 습관을 갖고 있고, 책을 읽기 전과 다를 바 없는 게으른 삶을 살고 있다. 아직까지 진정한 Good Friday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의 고통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겠지만, 익숙한 것과의 끊어냄 역시 고통이 따른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고통 없이 새로운 시작의 즐거움만 찾으려 하고 있다. 그래서 몇 년이 흐른 오늘까지 진정으로 변하지도, 새로 시작하지도 못하고 있다.
왜 갑자기 몇 년 전의 일이 떠올랐을까? 금요일을 10 여 분 앞둔 지금,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나만의 Good Friday를 가져야겠다.
처음 시도를 했던 마흔세 살도 훌쩍 지났다. 이제 고통이 없이는 기적도 기쁨도 없다는 걸 진정으로 깨달을 나이도 되었다.
* Good Friday의 어원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과 논쟁이 있는데,
본 칼럼은 그중에서 미국의 가톨릭 교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을 근거로 작성했다.
참고 문헌: 1. Christianity.com: What’s so good about “Good Friday” by Justin Holcomb
http://www.christianity.com/god/jesus-christ/what-s-so-good-about-good-friday.html
2. BBC.com: Who, What, Why: Why is Good Friday called Good Friday?
http://www.bbc.com/news/blogs-magazine-monitor-27067136
그림 출처: https://www.timeanddate.com/holidays/common/good-fri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