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생전 마지막 산문집
그의 글은 단숨에, 쉽게 읽힌다. 단문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려운 단어도 많고, 생소한 소재에 대해 쓴 글인데도 왜 이렇게 잘 읽힐까? 아마도 실제 경험한 사건을 묘사하는 생동감과 날카로운 문체에 있는 듯하다. 박완서의 작품들은 이야기의 생동성, 문체의 날렵함, 자연주의적 관찰의 탄탄함으로 이룩한 독자적인 스타일이 어우러져 풍부한 사실적 실감이 넘치는 소설로 잘 빚어진다.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 속내를 후벼 그 안에 숨은 끈질긴 욕망과 위선과 이중성을 파헤치는 그 직정적인 문체는 읽는 이의 가려운 데를 시원하게 긁어준 듯 상쾌함을 넘어서서 통쾌하기까지 하다. 사람의 변덕스러운 욕망과 그것을 넓은 테두리로서 감싸는 시대, 그리고 개개의 욕망과 시대가 만나 빚어내는 풍속에 대한 통찰은 뭉툭한 법이 없다. 퍼렇게 벼린 칼로 정확하게 그 핵심을 파고든다.
막 대학 문턱에 들어선 초년생에게 대학은 진리와 자유의 공간이었고, 만 권의 책이었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문장이었고, 지적 갈증을 축여줄 명강의(名講義)였고, 사랑과 진리 등 온갖 좋은 것들이었다. 나는 그런 것들로 나만의 아름다운 비단을 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 베틀에 앉아 내가 꿈꾸던 비단은 한 뼘도 짜기 전에 무참히 중턱을 잘리고 말았다. 전쟁은 그렇게 무자비했다.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으니까 다른 인생을 직조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당초에 꿈꾸던 비단은 아니었다. 내가 꿈꾸던 비단은 현재 내가 실제로 획득한 비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또 책을 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내 자식들과 손자들에게도 뽐내고 싶다. 그 애들도 나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참 좋겠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自閉)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