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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하 Aug 21. 2023

월든

헨리 소로, 월든의 자연인

 적당한 잠자리와 의복만 있어도 인간이 체온을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연료를 과도하게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말해 체온보다 실내 온도가 높아졌을 때부터 인간은 거꾸로 불 위에서 조리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월든(Walden)>의 저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1817.07.12 ~ 1862.05.06)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사상가, 시인, 수필가, 초월주의자이다. 널리 후세에까지 읽히는 고전을 쓴 저자 중에 누구 하나 평범한 사람이 있을까만,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중에서도 갑(甲)이라고 할 정도로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요즘 유행하는 자발적인 가난, 자연인의 삶을 몸소 실천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그 시절에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지성인이 확실하게 보장된 꽃길을 팽개치고, 산속에 들어가 소박한 삶을 살기란 쉽지 않았을 거다. 뭐가 그를 이런 삶으로 이끌었을까?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서 남쪽으로 1마일 반 정도 떨어진 곳에 월든(Walden)이라는 작은 호수가 있다. 물이 들어온 내력과 나가는 길을 파악하기 힘든 신비한 호수이다. 1845년 3월 말, 27세의 젊은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호숫가 숲 속에서 도끼질을 하기 시작했다. 호수 북쪽 비탈진 언덕에 자신이 기거할 오두막을 짓기 위해서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기에 저 서툰 손놀림으로는 도대체 개집 하나 만들어낼 성싶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로의 손놀림은 부드러워지고 신속해졌다. 5월 초순이 되자 소로는 친지들과 함께 상량(上樑)을 했다. 벽을 붙이고 지붕 올리는 일이 완료되자 소로는 마침내 새로운 집에 입주했다. 7월 4일, 미국의 독립기념일이었다. 19세기의 진정한 자유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2년 2개월 2일 동안의 모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으며 그곳에서의 삶은 그의 작은 오두막을 어떤 거대한 건축물보다 위대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 – 책 소개 중에서(<월든> 문예춘추사, 2017)

모험은 집을 지을 때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소로는 자신의 힘으로, 그리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집을 짓고자 했다. 집이라곤 한 번도 지어본 경험이 없는 이가 땅을 파고 돌을 나르고 도끼질하고 톱질하는 것 모두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지출한 건축비는 28달러가 조금 넘은 금액이었다. 당시 하버드대학 기숙사의 1년 방세가 30달러였다니, 1년 방세도 안 되는 돈으로 평생 거주할 수 있는 집을 지은 것이다. 당시 1달러가 현재의 1달러보다 약 30배의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때, 오늘날의 돈으로 1천 달러가 되지 않은 돈으로 집을 지은 셈이다.


  소로는 왜 이런 모험을 감행했을까?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집의 노예였고 재산의 노예였고 일의 노예였다. 그는 월든 호숫가에 작은 집을 짓고 농사지어 자급자족하면서 여유 있게 살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노예로서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하기 위해 그는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으면서, 그리고 최대한 여가를 즐길 생각이었다. 그것이 바로 소로가 생각하는 자유인의 길이었다. 그는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의 삶을 낱낱이 기록했다. 그 기록이 바로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비견되는 명작 <월든>이다. 물론 소로의 상황은 자발적 고립이라는 점에서 외딴섬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의 상황과는 확연히 다르지만, 두 작품이 모두 원시적인 상황에 직면한 인간의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소로는 <월든>에서 “간소하게,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제발 바라건대, 여러분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하지 말라. 백만 대신에 다섯이나 여섯까지만 셀 것이며, 계산은 엄지손톱에 할 수 있도록 하라”라고 말했다. 잠시라도 한눈팔게 되면 뒤처지는 현대인에게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월든>이 소로가 살았던 때보다 물질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20세기 후반, 특히 21세기에 더욱 각광받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대학을 졸업한 소로는 생계를 위해 교사 생활을 하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콩코드의 마을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체벌해야만 하는 현실을 견딜 수 없어 2주 만에 그만두었다. 형과 함께 사설 학교를 몇 년 운영하지만 형이 몸이 아프게 되자 그것마저 그만두었다. 소로는 이제 시인이자 박물학자로서 식물표본상자와 쌍안경을 들고 새로운 길을 걷기로 했다. 


  소로는 원래가 모험가적 성향이 강했다. 형 존과 함께 카누를 타고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을 탐험한 것도 이러한 성격에 기인한 것이었다. 안정된 교사의 길을 접고 시인의 길을 택한 것도 일종의 모험이었다.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생활한 것은 모험의 정점이었다.

젊은 시절의 헨리 소로(동생, 소피아 소로의 그림, 1839)

하지만 그의 위대한 모험이 그에게 안락한 생활을 제공해주지는 못했다. 뉴욕에서의 작가생활 시도도 실패했고,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의 카누 여행 경험을 담은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의 일주일>은 형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듬뿍 담아 집필했건만 거의 팔리지 않았다. 다만 소로에게 안락한 생활이란 일반적인 것과는 판이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가 불행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모험을 통해 인생을 충분히 즐긴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면 소로의 삶은 결코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그의 시세계는 널리 인정받지 못했고, 심지어 가장 평판이 좋았던 <월든>마저도 각광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시민의 불복종>도 19세기말에야 널리 읽혔고 간디 같은 위대한 인물의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소로가 그만큼 뼛속까지 혁명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혁명적인 정신은 이해받기가 쉽지 않다. 엄밀히 말해 오늘날에도 제대로 이해된다고 볼 수 없다. 박홍규 교수(영남대, 법학)가 지적하듯이 소로는 여전히 자연예찬론자이자 환경운동가의 선구자쯤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사실은 인생을 단지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사람일 뿐이었다. 자유롭게 사는 것이 그의 소중한 가치였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는 때로 고립을 자초했고 사회와 싸웠고 글을 썼다. ‘문학적인 혁명가’라고 불릴만하다.


소로가 살던 200년 전 미국에 비해 현재 우리나라에서 물질은 훨씬 더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 서울에 아파트 한 채를 사기 위해 영혼까지 끌어 모아 돈을 빌리고, 그 돈을 갚기 위해 몸을 갈아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성공한 삶으로 여겨지는 시대이다. 소로의 뜻과는 반대로 “집의 노예, 재산의 노예, 일의 노예”의 삶이 더욱 공고해진 듯하다. 노예로서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온 몸으로 증명한 소로의 삶이 더욱 가치있게 여겨지는 날이다. 



그림 출처: https://scottberkun.com/2008/book-review-walden-by-thor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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