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저자 유발 하라리는 1976년 이스라엘 하이파에서 레바논계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2002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중세전쟁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리 대학교에서 역사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76년생 46세의 젊은 학자이다. 세계적 베스트셀러를 쓴 석학인데 나보다 좀 어리다. 이런 걸로 비교 안 하고 살고 싶은데, 살짝 언짢아지려고 했다. 그가 <사피엔스>를 썼던 2011년에는 서른다섯 살밖에 안 됐다. 나는 그 나이 때, 또 지금 뭐 하고 있나 생각하니 다시 언짢아지려 하지만 정신 차리자. 그냥 그가 뛰어난 사람임을 인정하자. 나는 나만의 글을 쓰면 된다.
어려서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유발 하라리는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세계 역사를 공부했는데 특히 중세역사와 군역사에 관심이 많아 이들을 집중 연구해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거시사(macro-history)적 질문에 집중되었다.
- 역사와 생물학에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 호모 사피엔스와 다른 동물 사이의 근원적 차이는 무엇인가?
- 역사에 정의란 있는가?
- 역사에는 방향이 있는가?
- 역사가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행복해졌나?
그래서 답을 찾았는가? 그런 것 같다. 위 질문에 대한 그간의 연구의 결과와 답이 바로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이다. <사피엔스>는 그야말로 시대(약 20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와 공간(전 세계)을 넘나드는 인간의 역사를 인류학, 사회학, 생물학과 결합하여 거시사(macro-history)적 관점에서 역사와 생물학과의 관계, 다른 동물과의 차이 등에 대한 답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에 정의란 있는가? 유발 하라리는 아니라고 한다. 2부 8장의 제목이 ‘역사에 정의는 없다’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 “역사가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행복해졌나?” 이 질문에 대해 유발 하라리는 ‘역사에 정의란 있는가?’ 만큼 노골적으로 대답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그가 이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했을 때, 7만 년 전 인지 혁명이 일어나 사피엔스가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을 때, 12000년 전 농업혁명이 등장해 정착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5백 년 전 과학혁명이 시작되어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을 때, 2백 년 전 산업혁명으로 사피엔스가 그 어느 때보다도 부유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이제 4차 혁명으로 또 하나의 세상을 시작하려고 하는 지금, 우리는 점점 행복해지고 있나? 제3부 ‘인류의 통합 ‘에서는 쉽게 “아니”라는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나의 답은? 누구보다 긍정적인 사람이지만 선뜻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런데 4부 19장의 제목이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이다. 그럼 행복해졌다는 건가? 그의 답이 궁금해서 6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역시 베스트셀러 작가는 다르다.
유발 하라리, 제국주의자인가? 행복 탐구자인가?
책을 읽기 전에도 “유발 하라리”라는 이름은 잘 알고 있었다. 몇 해 전에 “알파고 사태” 등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과 맞물려 그의 책과 강연은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유명해졌다. 평소 베스트셀러에는 거부감이 있어 잘 안 읽는 편이지만 <사피엔스>는 안 읽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읽을수록 조금씩 불편해지고 공감이 안 가는 부분이 있다. 특히 3부 11장 제국의 비전이 그랬다. 그래서 제국주의가 정당했다는 건가? 앞으로 우리가 21세기 버전의 제국주의를 다시 추구해야 한다는 건가?
나만 불편했던 건 아니었나 보다. 문화평론가 박민영은 ‘인물과 사상’ 2017년, 1.2월호에서 <사피엔스> 이야기의 근간이 되는 ‘빅 히스토리’에 대한 빈약함과 함께 유발 하라리의 ‘제국주의적 관점’을 비판했다. 그는 먼저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 전체의 잘못이라고 한 ‘전지구적 문제’에 가장 큰 책임은 정치가와 자본가가 지고 있다고 지적한 뒤, 이들에 대한 얘기가 없음을 비판했다. 그는 또 “137억 년가량의 우주역사를 24시간으로 줄이면 인간의 역사는 1초에도 못 미친다”며 광대한 우주역사에 눈길이 쏠리면 “현대사회의 가장 첨예한 자본의 문제, 그 자본이 조정하거나 접수하는 정치권력의 문제를 제대로 다룰 리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구제국이 건설된다 한들 진짜 전지구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을까?
한편 하라리가 ‘옛 로마 제국과 비슷하게’라고만 할 뿐 “구체적으로 어떤 주체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지구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라고 꼬집었다. 그는 “전지구적 문제 운운하는 것은 실제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원화된 권력과 지배구조를 만들기 위한 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하라리는 박민영 평론가와 진행된 이메일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답했다.
“우리는 어떠한 문제들에 대해 전 지구적 협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글로벌 자본주의 세력이 스스로를 강화하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도록 하는 ‘가면’ 일 수 있다는 당신의 우려에 나도 공감한다. 전 지구적 차원의 협력이 세계 자본주의에 의해 지배돼서는 안 되며,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시장세력이 결정을 내리는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19세기와 20세기엔 시장세력이 내리는 결정이 대부분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운영됐지만, 그것은 소비자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활력이 넘쳤기 때문이다. 21세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중요성을 잃어감에 따라 시장세력이 그들에게 맞서기 시작했다. 따라서 우리는 경제성장에 대한 개인의 행복을 보장하는 규제 메커니즘과 자유시장 방식 간의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 경향신문 2017년 7월 13일
유발 하라리의 답이 확 와닿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는 제국주의자인가, 아닌가? 위의 답만으로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제 행복에 대한 그의 대답은? 그는 <사피엔스>에서 불교의 행복에 대한 접근을 인용해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행복의 관건은 의미에 대한 개인의 환상을 폭넓게 퍼진 집단적 환상에 맞추는 데 있을지 모른다. 내 개인적 내러티브가 주변 사람들의 내러티브와 일치하는 한 나는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며, 그 확신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꽤 우울한 결론이다. 행복은 정말로 자기기만에 달려 있는 것일까?" <사피엔스> 556쪽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목표이다. 명상을 할 때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모든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며, 그런 감정을 추구하는 것의 덧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추구를 중단하면 마음은 느긋하고, 밝고, 만족스러워진다. 즐거움, 분노, 권태, 정욕 등 모든 종류의 감정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일단 당신이 특정한 감정에 대한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공상하는 대신에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 결과 완전한 평정을 얻게 된다. 평생 미친 듯이 쾌락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평정이다. ~ 그러다 마침내 그는 모래에 주저앉아, 파도가 마음대로 오고 가게 놔둔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사피엔스> 558쪽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쾌락적 감정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된 질문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고대의 수렵채집인이나 중세의 농부보다 이런 진실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을까?” <사피엔스> 560쪽
그래서 인간은 20만 년 전보다 더 행복해졌다는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역시 자기 스스로에게 달렸다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답을 들을 수밖에 없다. 밀리언 셀러에는 가장 평범한 진리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