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에서 시안까지 느림, 비움, 침묵
“구엘 차이(Guel cai, 와서 차 한잔 하시오!)
<나는 걷는다>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 (Bernard Olivier: 1938~ )가 터키를 여행하면서 터키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나도 터키를 여행할 때 종종 들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 사양했지만…
여행 또는 해외 생활 초기에는 가급적 현지인과 교류를 많이 하고 현지인처럼 살고자 했다. 90년 대 중반에 초대박 베스트셀러이자, 당시에 나의 가슴을 뛰게 했던 한비야의 여행기에서 받은 영향이 컸기 때문이었다. 현지인들의 관심에 항상 적극적으로 응답을 했었고, 때로 내가 먼저 관심을 보이고 그들의 삶에 들어가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나친 관심에 피로감이 커지고, 이로 인해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경우가 반복되면서, 차츰 그들의 관심에 무관심으로 반응하게 되었다. 여자가 중동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특히나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길 수 있다. 귀찮은 나머지 나중에는 아예 눈은 선글라스로 귀는 이어폰으로 막고 다녔다. 한편으로 아쉽기도 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옥석을 가리는 방법을 배웠다.
저자처럼 실크로드 전 구간을 걸어서 여행하기는 어렵겠지만, 차와 낙타, 도보를 적절히 섞은 실크로드 여행은 가능할 것 같다. 사실 몇 년 전에 서둘러 회사를 그만둔 이유 중의 하나가 친구와의 실크로드 여행 때문이었다. 안타깝게도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못 갔지만… 대신에 오랜 꿈이었던 터키와 모로코를 갔고, 그때 덜컥 회사를 그만둔 덕분에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고 글을 쓰며 "작가"라고 불리고 있다. 지금 <나는 걷는다>를 읽으며 터키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으니, 다시 한번 ‘신이 하시는 일’의 신비함(God works in mysterious ways)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은퇴한 기자이며 부인을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인 그는 더 이상 선택을 미룰 수 없는 교차로 앞에 서 있다고 여겼다. 어떤 결정은 내일로 미루면 이미 너무 늦은 것이 된다. 서둘러 떠남으로써 최대한의 것을 건져낼 수 있고, 적어도 나이 탓을 하며 너무 서둘어 스스로를 은밀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으로 구속하는 폐단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도 있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Bernard Olivier)는 1938년 프랑스 망슈 지방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여섯 살에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에 외판원, 항만 노동자, 토목공, 체육교사, 웨이터 등 다양한 분야의 일을 했다. 1964년 독학으로 바칼로레아에 합격하고, 이어 CFJ (Centre De Formation Des Journalistes, 프랑스 기자협회의 공인을 받은 저널리즘 부문의 그랑제콜)를 졸업했다. 30여 년간 파리 마치, 르마탱, 르피가로 등 신문과 잡지사에서 정치부 기자, 사회-경제면 칼럼니스트로 일했다.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베르나르 올리비에 또한 열렬한 독서광이었다. 특히 역사 분야를 탐독했는데, 독서를 통해 서양인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동양에 진 빚을 인식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은퇴 후인 1999년, 그는 바다에 병을 던지듯 실크로드에 자신을 던졌다. 이스탄불에서 시안까지 실크로드를 걸어서 여행하기로 결심한 그는 4년에 걸쳐 자신의 꿈을 실현해 나갔다.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기간을 정해 단 1킬로미터라도 빼먹지 않고 걸어서 실크로드를 여행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으며 느리게,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며 자신을 비우는 법을 배워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은퇴 이후 사회적 소수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삶을 재활했다. 여행이 끝난 후에는 비행청소년에게 도보여행을 통해 재활의 기회를 주는 쇠이유(SEUIL) 협회를 설립했다.
쇠이유는 프랑스어로 ‘문턱’이라는 의미이다. '이 문턱을 넘어야만 아이들은 비로소 자유로운 삶의 주인이 된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다. 호통판사로 유명한 천종호 판사가 쇠이유의 영향을 받아 2015년부터 "2인3각"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두 사람이 다리를 묶고 세개의 다리로 달리는 운동 경기처럼 2인3각은 청소년 멘티와 성인 멘토가 함께 8박 9일간 제주 올레길을 함께 걷는 치유와 응원 프로그램이다.
2022년에는 ‘손 심엉 올레’라는 이름으로 제주도 올레길을 걷는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다. 손 심엉 올레는 전 이원석 제주지검장이 주축이 된 제주검찰이 소년범 사건에 대한 새로운 선도 프로그램으로 도입했다. 죄를 밝혀내고 처벌을 구형하는 검사들이 형벌 대신에 선도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다니... 왠지 낯설었다. 그들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오랜 경험을 통해 형사처벌만으로는 소년범들의 재범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베르나르가 설립한 쇠이유 프로그램에 참가한 청소년은 재범률이 15%밖에 안 된다고 알려졌다. 그것도 높다고…? 일반 소년범의 재범률은 85%에 이른다. 아이가 석 달 이상 걸으면서 누군가를 믿고, 자신을 통제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으며 감탄과 놀라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동안 봤던 책의 저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독특하고 예상하기 어려운 행동들 때문이었다. 놀라움만 있지는 않다. 그랬더라면 읽으면서 심장이 너무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잔잔하게 감동을 주는 부분도 가끔 있어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길이 끝나는 정상에서 마치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는 한 남자를 보았다. 인가에서 10킬로미터쯤 떨어진 이곳에 살고 있는 앉은뱅이 노인이었다. ~ 그는 밤이면 덤불숲을 돌아다니다가 야외에서 그냥 잔다고 했다. ~ 나는 그에게 25만 리라짜리 지폐 한 장을 쥐어주었고, 그는 그 돈을 가슴에 꼭 품더니 내게 오랫동안 무슨 말인가를 했다. 알라가 내게 그 돈을 몇 십배로 갚아주실 거라는 뜻인 것 같았다. 사실 신에게는 그리 엄청난 액수가 아닐 것이다. 그런 보상보다는 차라리 알라가 이토록 헐벗은 자신의 피조물을 더 잘 보살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전에 만났던 두 눈이 먼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두 사람이 동료가 되어 서로 의지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