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자

자살이 허기진 밤 #002

by GSR
IMG_E4202.JPG


무언가 시작하려고 마음먹을 때마다 수많은 생각들이 몰려온다. 더 나아 보이고 싶은 자신감으로 일을 시작하지만, 작은 실수 하나가 모든 것을 뒤틀어 버릴까 두려움이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간다. 결국 수첩에는 시작도 못 한 채 철 지난 아이디어들이 빼곡히 남는다. 이미 지나 의미를 잃어버린 것들, 상황과 맞지 않아 꺼내지 못한 것들. 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아이디어들은 수첩을 펼칠 때마다 망설임의 흔적이 되어 나를 붙잡는다. 심리검사에서 ‘완벽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나왔던 적이 있다. 듣기에는 멋지지만, 실상은 시작조차 못 한 채 끝내버리는 나의 핑계였다. 머릿속에서만 시작하고 머릿속에서만 끝나버리는 생각들.


글을 쓰려하면 하나의 완벽한 글을 기대하지만, 몇 편을 쓰다가 결국 흐려지고 만다. 하고 싶은 말은 한꺼번에 쏟아지는데, 정리하려 들면 처음의 초점은 사라지고 문장은 미완으로 남는다. 생각들은 매듭처럼 엉켜 있는데, 손으로는 풀리지 않고 칼로만 끊을 수 있을 듯 보였다. 워드 프로그램을 켜는 일조차 스트레스가 되어버렸다. 영상 같은 다른 콘텐츠를 만들려 해도, 음악 저작권이나 편집 같은 부차적 문제만 떠올리다 이내 포기한다. 그리고는 "재능 있는 사람만 하는 거지"라며 하늘만 바라보며 누워버린다.


나는 변화와 도전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하는 마음 때문에 시작조차 하기 어려웠고, 결국 하지 않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알고 있다. 시작해야 발전이 있고, 꾸준함이 완성을 만든다는 것을. 그런데 나는 왜 늘 시작부터 완성형을 꿈꿀까.


잠시 손을 떼고 생각해 본다. 예전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광고 제작자나 에디터 같은 일을 하며 내 손에서 결과물이 탄생한다면, 그것이 나를 살아있게 만들 것만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건, 그 순간부터 그것이 더 이상 좋아하는 것으로만 남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제는 안다. 일은 단순하게 일하고, 좋아하는 건 취미로 남겨두는 것이 더 오래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완벽주의를 조금 접어 내려놓으려 한다. 스무 살에 쓴 글이 서른의 글보다 뛰어날 수도 있고, 때로는 부족한 결과물이 그 순간의 나를 더 솔직하게 보여줄 수도 있다. 비교는 의미가 없다. 지금 내가 만드는 것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려 한다. 모든 것이 완벽할 필요는 없다. 실패도, 불완전함도 기꺼이 껴안아야 한다.


나는 이제 아마추어처럼 자유롭게 즐기고 싶다. 프로처럼 욕심내지 않고, 불완전함 속에서 더 오래, 더 가볍게, 그러나 진심으로 이어가고 싶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서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