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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SR Aug 15. 2021

초기화 #005


며칠 전에도 노트북이 잠시 버벅거렸다. 내 노트북을 이리저리 보았지만 허용한 용량을 넘지는 않았다. 분명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설치했다 지웠다가 한 것이 쌓여서 문제가 된 것 같았다.  가장 깔끔한 방법은 초기화시키는 것이다. 초기화시키니 다시 전처럼 잘 동작했다. 속도도 빨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불필요한 파일들도 사라져서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역시 시간이 조금 들지만 초기화는 실망을 안겨주는 법이 없었다.


나도 초기화가 필요했다. 이상한 이미지 파일들, 모르는 확장자를 가진, 어떻게 동작하는지도 모르는 파일들, 그리고 게임이나 프로그램들을 설치하고 삭제하기를 반복하면 어느샌가 많이 쌓이는 파일들이 PC의 초기화처럼 한 번에 싹 없어져 버리기를 바랐다. 내게 있어서 그런 파일들은 주로 사람 아니 인간관계였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혼자 살고 싶었다. 그게 내가 꿈꾸는 초기화였다.


나와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나에게 관계에 있어서 의무 같은 것을 강요한 적이 없었고, 나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그냥 나 혼자 힘들어하고 과부하가 걸린 것이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하고 고민이 많고 사소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래서 부풀려진 문제들이 내 안에 있었다. 가끔씩 이런 말을 정말 친하다 생각한 사람에게 말을 조심스레 툭 던지듯 전하면 뭔가 힘든 일이 있냐고 물어본다. 힘든 건 아닌데. 나 혼자 과부하 걸린 건데.


그래. 나의 모든 생각과 감정들은 인간관계에서 온다. 이런 근원적 원인은 사람들이었고 이를 제거하고 싶은 마음에 항상 어디론가 떠나서 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에서 살고 싶다. 그 도시는 한동안은 나에게 파라다이스가 돼 줄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꿈꾸는 파라다이스에서는 나는 연락수단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연락이 힘들거나 안 되는 사람이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공간에서 혼자만의 작업을 하는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거나 다가가기 싫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도시에서의 삶이 익숙해지기 전 떠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나의 파라다이스이자 내가 나를 초기화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 침식해 글과 사진으로 무언가 그 삶에 대한 결과물이라던가 찌꺼기들을 내 보내면서 사는 것. 느슨한 삶을 보내면서도 과거가 생각나면 안 되기에 조금씩은 변화를 주는 것이 떠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삶은 쉽사리 원하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삶에서 초기화는 삶의 환기가 아니라 새로운 도전이며 그것은 내 삶 전부를 내던져야 얻을 수 있다. 꿈꾸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 겉으로는 도전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무서워하는 나는 나의 머릿속으로만 파라다이스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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