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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SR Aug 22. 2021

죽음 #008


 대학교 1학년이 끝났다.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기에 인생에서 가장 여유로우면서도 싫은 시기였다. 3월 중순, 입대일로 잡혀 있었다. 사람들을 모아 게임도 했고, 틈틈이 만났지만 허무했다. 어차피 나는 곧 끌려갈 운명이었고 친해져 봤자 2년 뒤면 초기화되니까 의미가 없었다.


 아직은, 군대에 갔다 온 후에는 학과에 대한 애정이 더 없어졌지만 아직 남아 있을 때였다. 2월이 되니까 점점 학과에도 신입생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리 들어온 신입생들을 위한 커뮤니티가 있었다. 그곳에서 신입생들은 서로 미리 친해지기도 했고 때때로 선배들하고도 먼처 친해진 사람들이 있었다. 


 학과에서도 신입생들과 입학식에서 처음 만날 한 학번 위 사람들을 모았다. 나는 내 동기들과 한 번이라도 더 만나기 위해 입학식에 참여했었다. 입학식이 끝난 후에는 학과 강의실에 모여 처음 인사를 했다. 간단하게 이야기를 할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한 명과 친해졌다. 1학년 동안 집 근처에 사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는데 얘는 우리 집과 지하철 역 1개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런 점 때문에 쉽게 친해졌다. 2~3주면 나는 군대로 가겠지만 그래도 친해지고 싶었다. 몇 번 만나기도 하면서 친해졌다. 입대하기 전 머리를 자르기 위해 미용실에 가려고 했을 때도 혼자 가면 쓸쓸하다며 같이 있어주었다.


 나는 입대를 했다. 한동안은 훈련소에서 굴렀고 한동안은 자대에서 막내 생활을 했다. 사지방이나 전화를 사용하기에는 막내는 너무 바빴다. 그러이 입대한 후 3달쯤 되었을까.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순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원래 몸이 안 좋은 친구였는데 학과 생활에 학과 동아리 생활까지 하며 피로가 겹쳤고 그게 사망 원인이 되었다고 했다. 그때 화나는 이야기도 함께 들었지만 조금 넘어가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등병 생활에도 버거웠던 나는 슬퍼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가끔 여유가 있을 때면 생각나서 괴로웠다. 너무나. 말년 휴가였나, 전역을 하고 나서였나, 안장되어 있는 납골당에 홀로 가서 바라만 보고 왔다. 


 내 주변 또래 나이대의 첫 죽음이었다. 삶을 다시 생각할 만큼의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친구와 친해진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입대 후에 연락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이등병이었다. 이등병이어서 나는 크게 슬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생각할 수가 없었고 시간이 나면 생각이 더 났다. 그래서 납골당에 갔다 와서도 한동안 생각이 났다.



 20대 후반이었을 때, 문자를 받았다. 고등학교 1학년 친구의 죽음이었다. 엄청 친하지는 않았고 고등학교 1학년 이후에 연락조차 하지 않았던 친구였지만 사이가 나빠서 그런 건 아니었다. 연락이 되는 고등학교 1학년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 함께 장례식장에 가면서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그 친구는 우선 키가 작았다. 그러면서도 축구를 무척 잘했다. 중앙 미드필더를 주로 뛰면서 경기를 잘 조율해주던 친구였다. 함께 노는 친구들이 달라서 더 깊게 친해지진 않았지만 가끔씩 보면 인사를 했던 친구였다. 연락은 하지 않았던 건 단지 덜 친해진 친구였던 것뿐.


밤에 우리는 만나 같은 버스를 타서 내렸다. 장례식장에 들어가기 전 비치된 봉투를 꺼내 조의금을 넣었다.  인터넷에서 찾아 봉투 앞에 어떤 것을 써야 하는지 찾아 적었다. 들어갈 때 잠깐 보니 육개장을 먹는 공간은 이미 꽉 찼다. 구두를 벗고 들어가니 친구 어머니는 울고 계셨다. 옆에 친구의 여동생은 너무 어려 보였다. 우리 셋은 두 번 절을 하고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절을 했다. 목례까지 마쳤을 때 어머니는 이미 눈물을 주체할 수 없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기억나는 건 한 문장이었다. 

  "우리 아들을 잊지 말아 주세요"


우리는 육개장을 먹지 않았다. 자리도 없었지만 왠지 나는 그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무언가 무겁게 누르는 것이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다녀갔던 친구들과 연락이 되어 우리는 치킨집에서 만났다. 우연히 동창회가 되었다. 다들 최소 5년은 못 본 애들이었다.


 친구는 길고 긴 취업준비를 통해 입사한 대기업 첫 워크숍에서 강요로 술을 너무 많이 먹었다고 했다. 그래서 아침에 보니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회사에서는 극구 부인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진실을 알 수가 없었다. 우리도 단지 정황만 듣고 뉴스 기사를 확인해서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또한 알게 된 것은 그동안 홀어머니 손에 자랐던 친구였다. 나는 친구의 가정사를 몰랐지만 듣고 보니 안타까웠고 슬펐다. 어머님이 하신 말을 전부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씀하셨던 것은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침울했고 적당히 반가웠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끼리 안부를 전했다. 적당히 안부를 묻고 나서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20대 중후반이었다. 이제 사회를 시작하는 우리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웃겼다. 이때 유행하던 말이 욜로였다. You Only Live Once. 그때 친구들은 욜로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다. 다들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거나 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친구의 죽음은 충격적이었다. 다들 그런 말을 했다. 언제 우리가 죽을지 모르니 인생을 즐기면서 살자. 하지만 그 감정들이 한순간의 스쳐가는 감정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다들 죽을 날을 생각한다. 그건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삶을 다 보내고 맞이하는 마무리였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내일 죽을 것처럼 살 수 없었다. 만약 내일 죽지 않는다면 남은 날들은 죽기 전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만약 내일 죽을지라도 모르기 때문에 늙어 죽는 것만 생각해야 했다.


우리는 아직 죽음을 생각할 수 없다. 이 두 번의 장례식을 제외하고는 실감이, 와닿지 않는 죽음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했다. 죽음은 언젠가 다가올 막연한 미래라는 것에서 내일이라도 찾아올 수 있는 것으로 다가왔다. 어렸을 적, 밤, 혼자 집에 있을 때 느꼈던 부모님이 돌아오지 않을 거란 막연한 두려움에서 보이는 두려움으로 바뀐 셈이었다. 생각보다 우리는 죽음과 가까이 살고 있었다. 그러면 우리는 다가오는 죽음이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다. 오지도 않을 죽음을 대비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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