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 허기진 밤 #037
24년도 점차 끝나가다 보니 회사에서도 행사를 잡았다. 연말 행사다 보니 술도 적당히 마셔 적당히 취기가 올라 살짝 후끈해진 몸을 영하 5도라는 날씨가 식혀주는 밤이었다. 이어폰을 착용하고 노래를 틀었다. 눈을 감고도고 갈 수 있는 길처럼, 한치 망설임 없이 걸어갈 수 있는 길에 듣는 노래는 얼마나 아름다운 지. 내가 걸어갈 길은 발이 기억하고 나는 생각 안 하고 노래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차갑게 얼굴에 감겨드는 바람. 간접적으로 추워지는 패딩 속 몸의 느낌. 마비되어 가는 발가락. 이 모든 게 뭔가 조화로웠다.
SNS에 2개의 스토리를 올렸다. 집에 도착하여 잘 준비를 마치고, 이것저것 하다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전 여자 친구가 스토리 두 개를 모두 봤다는 표시가 떴다. 나름 평화롭다고 생각했던 기분은 거기서 끝이었다. 요동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원래 SNS를 안 하는 성격이기도 했기에 이런 적도 거의 처음이었다. 나는 흔들렸다. 갈대도 나만큼은 아니었을 거다. 나는 헤어지기 싫었기에,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한다면 이성이 반대해도 마음이 수락할 것 같다는 생각을 계속, 정말 계속하다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다.
전 여자 친구는 나쁜 년이었다. 나를 떠난 것 자체가 그랬다. 매몰차게 내게 했던 말들은 본인에게 적용되지 않았던 모순이 있었고, 나의 탓으로 헤어지는 거라고 말하면서 헤어졌다. 그 말을 듣는 나는 더 이상 사람을 만나지 못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몇 년을 만났지만 사람 하나도 대략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나라면 그 누구도 나를 좋아할 수도 없고, 나는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그 긴 시행착오를 견딜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애와의 추억이 든 물건들을 한쪽에 쌓아두었다. 선물을 건네줄 때 감싸고 있었던 쇼핑백까지.
헤어지고 나서 생각하는 전여자 친구는 실제의 전여자 친구와 다른 사람이다. 지속적인 만남이 없다면 그 사람에 대한 성격, 이미지, 생활습관, 그리고 나의 행동과 말에 대한 반응이 다 나에 맞춰서 재구성된다.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변해버린다. 나는 그렇게 내 생각 속의 전여자 친구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너 없이도 너를 좋아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너는 나에 맞춰 재구성된 너이며 이제 실제의 너는 내가 좋아하는 너와 다른 존재이니까. 나는 이제 네가 아닌 다른 너를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밤은 깊어갔고 어둠과 침묵은 나를 계속 죄어왔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세지고 가슴을 안 두드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해졌다. 처방받은 우울증 약을 먹었다. 또한 가슴이 답답해지면 먹으라는 약도 하나 더 먹었다. 그리고 드디어 자리에 누웠다.
우울증은 세상이 내게 왜 이렇게 했는데 아직도 안 죽지?라고 하면서 툭툭 건드리는 느낌이다. 이제 그 모습을 전여자 친구의 모습으로 내게 하고 있는 것 같다. 때때로 핸드폰을 하다가, 집에서 컴퓨터를 하다가 발견되는 사진을 보면 나는 답답해진다. 너는 내게 이미 우울증이고, 너는 내게 말한다. 왜 아직도 죽지 않느냐고. 세상은 너를 버렸다고.
사실 나도 죽고 싶다. 용기가 없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