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 허기진 밤 #047
역설적이게도 나와 친한 사람들보다, 적당히 알거나 처음 본 사람들에게는 나의 진실된 생각을 말할 수 있다. 이제 친한 사람들과는 깊은 마음을 나누기가 힘들다. 이미 너무 나누어버렸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너무 잘 안다. 이제 웬만큼 시간을 보낸 사람들하고는 말을 하지 않아도 반응을 알 수 있다. A는 분명히 뭐라고 하겠구나, B는 귀찮아하겠구나, C는 그냥 술만 마시겠구나 하는 것들은 이제 생각할 필요도 없이 안다. 나는 이런 말들을 하고 이런 말들을 들으려고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또한 이해관계가 조금이라도 엮여 있다면, 생각이 더 많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의 인연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고, 과거를 아는 그런 친구들과, 회사 동료들이 대부분이기에.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건 익명의 공간이다. 나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가장 객관적으로 나를 알 수 있지만, 나를 드러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더 공감해 주고 객관적이고 다양한 시각을 내게 줄 수 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내 글을 본다면, 내가 누구를 생각하고 이런 세세한 관계를 알 수 있고 본인의 생각을 필터링 없이 내게 줄 수 있다는 점이 나는 너무 싫다.
"너 아직도 걔 생각하고 있어? 바보냐. 걔를 왜 또 만나려고 해?"
"네가 그렇게 욕하면서 회사는 왜 다니는데. 더 좋은 회사로 바로 이직해"
"그냥 퇴사하고 놀고 싶다고? 미쳤냐? 집 사야지. 지금 놀 틈이 어딨 어"
지긋지긋하다. 이제 나는 모두가 지겹다. 이제 나를 아는 사람들하고 나눌 수 있는 건 지루한 시간 말고는 없다. 취미도, 삶도, 술도 나눌 사람이 없다. 친구들하고는 취할 때까지 술을 마실 일이 없어진 지 오래. 그나마 회사 사람들과 술을 마시지만 대부분이 회사 일을 안주로 나눈다. 모두가 나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일은 없다. 후회만 남을 수밖에 없는 만남만 있을 뿐.
그런 이유에서 나는 늘 나를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삶을 이어나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런 특성상 한 곳에서 생활을 한다면, 누구든 나를 알고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그게 바로 다시 떠나야 한다는 신호를 내게 주는 것이다. 그게 아마 나의 여행, 나의 삶이 될 것처럼 느껴졌으나 아직 떠나지 못했다. 또한, 먹고사는 것이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에, 정착하여 회사의 돈을 받고 구성원과 관계를 맺어 시너지를 내는 것은 나의 벌인 셈이었다. 그거는 작은 기쁨과 많은 후회를 내게 가져다준다. 그 기쁨이라는 것이 더 높은 후회를 가져다준다 하더라도 그것을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워킹홀리데이를 생각하고 있다. 인터넷 상이 아닌 실제 익명성을 가져갈 수 있는 그런 물리적 공간. 조금만 더 있다면 가지 못할 나이가 되기에 그전에 일단 서류라도 내보려고 한다. 지금 나의 커리어가 7년을 넘어가고 있는 차에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지인들에게 광역으로 나를 욕해주라는 말과 같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적당히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말했다. 적당한 관계란 적당히 귀찮고, 적당히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응원만 받을 수 있는 그런 관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게 내가 바라는 것이었다. 아마 합격을 한다고 해도 삶에 있어서 선택지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 가도 되는 거니까.
신기하다. 이미 나와 깊은 시간을 나눈 사람들은 멀어져 가거나, 싸우거나, 연락이 끊겼고, 애매한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꾸준히 연결되어 있다. 어쩌면 한 발자국 정도 멀어진 관계가 나와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거리가 아닐까? 나는 이러한 고독이 기본 설정인 사람일까?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나에게서 느끼는 역겨움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직도 모르는 건 사람이다. 사람들 개개인의 특성을 파악하기에 의욕이 없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다. 어떤 말을 해도 사실 이제 기억이 잘 나지 않아 깜빡거린다. 아... 그때 말씀해 주셨죠? 지금 기억났네요.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전에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하나의 기쁨일 시절이 있었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고 그들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한 의욕은 이미 꺾였다. 여행에서 만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같았다. 늘 같은 질문을 주고받는다. "어디에서 이 도시로 오셨어요?", "다음 여행 루트가 어디예요?", "~~ 해보셨어요?" 몇 명이 지나면 특별한 인연 말고는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름이 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공허함이 어디까지 갈까? 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떠났다. 나는 이 허무함과 공허함을 극복하고 사회적이 될 수 있을까? 나의 삶과 정신이 안정적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