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이 허기진 밤 #076
나는 싫어하는 것이 있다. 지하철에서 가끔 보이는 축 처진 노인, 길거리에서 소리치며 울부짖는 사람들, 외모와 태도에서 이미 눈치를 보는 사람들. 바로 불쌍한 사람들. 주름이 지혜의 상징이 되지 못한 사람들, 스스로를 놓아버린 비참하게 불어나 버린 사람들. 외모나 태도로 동정심을 이끌어 내는 것. 나는 불쌍해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싫다. 당당함이 없고 자신이라는 존재가 말살된 사람들. 때때로 역겹게까지 느껴진다. 왜 나는 불쌍한 것들을 참을 수 없는 걸까.
나는 모든 사람들이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무례한 것도 참을 수 없지만 불쌍한 것을 보는 건 그 이상으로 더 심적으로 부담을 주는 것. 어쩌면 나는 삶의 특정 단면을 마주 보는 것 자체가 부담인 사람인 것 같다.
어렸을 시절 부모님과 함께 텔레비전을 볼 때, 수치심을 느끼는 장면들이 나올 때가 있다. 그런 장면들은 볼 수 없었다.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닭살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그런 떨림. 그래서 신파를 볼 수 없었고 몇몇 장면들은 채널을 돌릴 수밖에. 마음이 간질거리는 걸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일까? 그만큼 나는 단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가 단단하지 않기에, 나를 흔들리게 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배제하는 형식으로 나는 나를 지키고 있었는지 모른다. 감정에 쉽게 손상을 입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는 좁아, 감정을 억제하여 가능한 느낄 수 없게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 다만 그만큼 기쁜 감정들도 쉽게 느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일지도.
그래서 나는 단단한 사람을 동경했는지 모른다. 나처럼 우왕좌왕하지 않는, 삶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 삶의 안개가 낀 내가 아닌 햇빛 밝은 날처럼 명확한 사람. 나에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이게 잘못되지 않았다는 방향에 대한 확신. 그런 한줄기 빛 같은 사람.
지금은 신념을 가지기가 어려운 시대. 삶이 끝날 때까지 가져가야 할 그런 곧은 심지는 오히려 무너지는 시대. 그래서 어쩌면 나의 삶에서 그런 단단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단단한 사람은 나의 흔들림을 이해 못 했고, 나도 때때로 그 단단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순간은 시간일 수도, 시기일 수도 있었다. 결국 성향상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았다.
함께 흔들리는 사람을 만나보아도 어려웠다. 함께 흔들린다면 그건 절망과 방황뿐. 나조차도 나의 흔들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당하지 못하는데, 함께 흔들린다면 그런 일은 있으면 안 되었다. 이해하지 않고 긍정하는 것이 나의 태도. 그럴 수 있지 라는 그런 단어로 압축할 수 있는 나의 태도. 그럼에도 조금의 이해가 있어야 긍정의 방향성이라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함께 흔들리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
결국 나는 흔들림을 견디지 못해서 무너지는 사람들을 불쌍한 사람들로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본인의 존재의 확신이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다르다. 확고하고, 고집이 있고 때때로 오만하게까지 보이는 사람들은 이미 그 표정에서부터 드러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비참하고 비굴해 보인다. 나는 어쩌면 나의 미래를 그 사람들에게 투영했기에 싫어하고 역겨워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럴 바에 죽기를 원했고, 죽더라도 표면적으로는 고고하게 죽기를 원했다.
남들에게 무척 쉽게 느껴지는 삶이, 나에게는 왜 이렇게 버겁게 느껴지는 것일까? 선택하는 것을 조금 더 쉽게 할 수는 없을까? 나는 왜 흔들리고 흔들려서 존재에서의 멀미를 느끼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롤스로이스라면 흔들림 없었을 테지만 티코 정도의 나로서는 카시트와 바퀴정도를 가는 방법밖에는 아직 모르겠다. 결국 나는 나 스스로를 바뀌는 것이 답인 것이라는 방향은 알지만, 그 방법은 모른 채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걸 알기 위해 나는 내 안으로 깊게, 더 깊게 파고 들어가고 있지만 아직 얻은 것은 더 깊은 흔들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