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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구마 Jul 28. 2021

그러니까, 제 별점은요,

차구마 일기

가끔 아껴 읽는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 2018, 한겨레출판사)을 보면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애초에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결핍됐기에, 남의 슬픔을 내것처럼 느끼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공부─주지하다시피 가장 고통스러운(?) 행위─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노력을 기울어야 우리는 비로소 슬픔을 슬픔으로만, 고통을 고통으로만 방치하지 않게 된다는 다짐이다. 세상에 단일한 진리는 없다고 믿는 편이지만, 저 제목만큼은 제법 정확한 일리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이 문장이 오래된 영화 소개 프로그램의 단골 멘트처럼 들리는 까닭은 이 남자의 인생이 각본 잘 짜여진 한 편의 영화 같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평생을 공부했고, 사법시험에 여러 번 낙방한 끝에 검사가 됐고(9수 끝에 사법시험에 붙었다는 사실은 거의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오로지 조직에 충성하며(?) 우직하게 범죄를 때려잡았다. 물론 중간중간 위기를 겪었지만, 남자는 모든 역경을 결국 극복하고 승승장구했다. ─ 여기까지만 보면 한 인간의 노오력과 사회정의와 권선징악 따위의 메시지를 담은 밋밋한 범죄소탕우당탕탕성장드라마겠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잔잔한 웰메이드 영화에서 관객의 흥미를 확 잡아 끄는 블록버스터 영화가 되기 위해 우리의 주인공은 억지스러운 반전을 준비하고 만다. 남자는, 결국, 신이 되려 한다.


어쩌면 누구나 동경하는 완벽한 인생이 될 수도 있었던 저 남자의 치명적인 약점은 무엇인가. 힘들게 사법고시를 공부했지만 정작 그는 슬픔에 대해 공부한 적이 없다는 것. 평생을 형법의 문법과 검찰 조직의 맞춤법 속에서 살았고, 그가 주입식으로 암기한 차가운 문장 속에서 슬픔이나 연민 같은 인간미는 숨쉴 수 없었으며, 범죄의 맞은편이 정의라는 단순한 도식으로 단련되었기에, 단언컨데 남자는 슬픔에 무지한 사람이 돼버린 것. 조직의 틀에서 벗어나 계급장 떼고 본격적으로 대중을 만나기 시작한 그의 언행에서 그의 절대적인 이해력 부족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가 몸담았던 자랑스러운(?) 조직의 끝판왕까지 오른 남자는 타인의 슬픔에 무지한 상태로 온갖 눈물과 소음과 슬픔을 어루만질 시스템을 다듬는 위치까지 넘보고자 한다. 우리는 '주 120시간 노동' 처럼 시대를 거스르는 굳세고 억지스러운 의지를 뽐내며 도리도리/우왕좌왕 질주하는 그의 성장 스토리를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서사의 뒤편엔 거대한 슬픔이 여전히 남아있다. 스크린도어를 고치던 청년이 지하철에 치여 죽었고, 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청년이 기계에 끼어 죽었고, 평택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청년이 컨테이너에 깔려 죽었다. 이건 분명 그가 제대로 공부해야 할 슬픔일 테지만, 이미 치러낸 9번의 사법시험 질려버렸는지, 그는 여전히 공부할 의지조차 보여주지 않고 있다. 슬픔에 무지할 때 비극이 탄생하는 법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비극이 탄생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는 공부가 부족했기에 슬픔을 이해할 줄 모른다. 다만 범죄를 때려잡듯 슬픔 자체를 파괴하길 원할 뿐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신이 된 동물"(호모 사피엔스종)의 폭력성을 경고했건만, 남자는 보란듯이 가장 위험한 신이 되어 질서와 시간을 거스르려 한다. 남자의 무모한 의지로 인해 교훈이 담긴 순한 맛 성장영화는 대중없는 블랙코미디로 전락하는 중이다. 소란 덕분에 흥행엔 성공했을지 몰라도 굳건했던 평점은 점점 떨어지고 있으니, 어쩌면 스스로 영화의 장르를 파괴해준 남자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평소엔 날선 비판이나 조롱을 즐기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용서하길. 당신은, 정말,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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