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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구마 Nov 12. 2021

니코틴 목소리, 의리적 구토

차구마 일기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친한 동생이 있다. 늘 자신감 가득한 당찬 녀석이고, 또 그만큼의 실력이 받쳐주는 녀석이다. 늘 잘해왔고 또 잘해갈 부러운 친구이기에 그런 목소리를 기대하고 전화를 걸었다. 도무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이 못난 형이 자극을 좀 받고 싶어서.      


네 형.

전화를 받는 낮고 또렷한 목소리. 여전히 같은 음색이었으나 이전보다 조금은 지쳐 보였고, 약간, 아주 약간은 무너져 있었다. 같은 또래는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게 있다. 학창시절의 가라앉은 목소리라면 모의고사 성적이 나온 것, 중년의 애써 덤덤한 목소리라면 요즘 부모님이 편찮으신 것 같은. 우리 또래의 그런 목소리라면 아마도 마음에 구름이 잔뜩 껴 미래가 말끔하게 보이지 않는 날이겠지. 스멀스멀 걱정이 올라오는 날, ‘우리는 청춘이야!’라는 위로 따윈 들리지 않는 날. 그런 날이라면 기꺼이, 와르르, 나도 오늘은 함께 무너져도 괜찮겠다는 생각. 그렇게 짧은 통화가 이어진다.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동생은 독서실에서 잠깐 담배를 태우러 나오며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역시나. 고민을 품은 목소리에선 가끔 담배 냄새가 난다. (평생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내 몸에 분명 타르와 니코틴이 쌓여있을 것이라고 믿는 이유기도 하다.) 녀석 목소리에서 풍기는 멜랑콜리함은 담배 냄새 때문인가, 아니면 담배 냄새가 멜랑콜리함을 만든 것인가. 어쨌든 니코틴이 삶의 더께로 쌓여가는 시간, 우리는 짧은 시간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는다. 제재는 달라도 주제는 비슷하다.     


앞서 가버린 친구들, 

정신없이 뒤만 쫓다가 그 길을 가는 이유도 의미도 희미해져 버린,

남은 것은 공허함, 

그 텅 빈 공간을 채우는 불안감, 

흔들리는 해피엔딩에 대한 확신.      


잘될 거야. 힘내자.


너에겐 이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다. 어지럽다. 멀미, 멀미가 난다, 우리는 그저 서로 등을 두드려줄 수밖에. 이것이야말로 ‘의리적 구토’겠지. 전화를 끊는다. 편안하다. 마음이 조금 괜찮아진 건지, 멀미에 취해버린 건지, 아니면 완전히 무너져 바닥에 누워버린 건지. 변한 것도 해결한 것도 없는데, 잠시나마 찾아오는 이 안온함은 대체 무엇일까. 나만 힘든 건 아니라는 못된 안도감일까. 도무지 모르겠다. 서른엔 얼마나 잘 되려고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져 내리는지. 나의 아홉수, 믿지 않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가뜩이나 길어진 가을밤이 더 길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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