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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구마 Dec 30. 2021

연말 보너스가 없다고요?

차구마 일기

*

차 대리, 아쉽지만 올해 연말 보너스는 없다고 하시네.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는 말고.     


*     

조촐하게 떡볶이와 순대와 튀김을 펼쳐놓은 널찍한 테이블에 직원들이 둘러앉는다. 오렌지 주스로 어색한 건배를 한다. 올해도 고생하셨습니다. 다들 조용히 음료를 홀짝인다. 식어버린 떡볶이를 오래 씹고, 순대를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는다. 사무실이 한없이 고요하다. 게걸스럽게 떡볶이를 집어 먹던 대표가 이내 침묵을 깬다. 종무식 겸 시무식인데 다들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고 끝내죠. 함박눈처럼 고요하게 덮이던 어색함의 농도는 더욱 짙어진다. 빙글빙글 빠르게 돌아오는 제 차례에, 머뭇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더듬더듬 끌어내는 소감의 내용들은 대체로 이렇다.      


... 어... 올해 회사가 잘 돼서 다행입니다... 내년에도 열심히...     


마지막 차례를 맡은 대표가 장황하게 얘기를 시작한다.     


작년까지 회사가 참 어려웠는데, 올해 다들 잘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내년에는 우리가 더 분발해서...     


대표의 말을 끝으로 자리가 마무리돼간다. 이때쯤이면 보여야 할 것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를 테면, 하얀 봉투 같은 것. 주고받는 직원들의 눈빛에 불안감이 섞이기 시작한다. 에이, 설마. 하지만 보이지 않아. 먹다 남은 떡볶이 그릇과 오뎅 국물이 다 정리될 때까지, 봉투 비스무리한 것도 보이지 않아. (쓰레기봉투 빼고.) 젓가락을 놓자마자 자취를 감춘 대표가 다시 등장하길 기다리며 크고 작은 동공들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곧 퇴근이에요. 대표님 어서요. 타이밍이 벌써 지났다고요. 고맙다면서요.     


*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다사다난했던 올해가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내가 무엇을 했더라. 대체 왜 했더라. 작년 매출의 2배가 훌쩍 넘은 숫자들과, 그저 행복해 보이던 대표의 표정과, 생기를 잃어간 직원들의 눈빛 속과, 그 속에서 작게 반짝이던 기대감. 노동의 결실로 맺은 열매에서 떨어질 약간의 콩고물을, 우리는 당연히 기대하고 있었고. 가슴이 턱 막히도록 묵직하고 뜨거운 무엇이 속에서 올라온다. 부글부글.

대표님, 떡볶이 말고, 돈이요 돈. 그냥 돈 줘 이 새끼야.     


*      

계약서에 없는 것은 우리의 권리가 아니고

계약서에 없는 것은 너무도 많다.       


*     

퇴근길에 전화가 걸려온다. 김 부장님.

아니 부장님, 저 진짜 섭섭합니다. 올해 회사가 이렇게 잘 됐는데 겨우 이따위 대우인가요. 제가 여기를 계속 다녀야 하나요. 하고 싶은 말은 너무도 많지만,     


아, 네. 알겠습니다.     


*    

철없는 아이처럼 투정 부리고 싶은 날이야.

애초에 내 것은 아니었는데,

내 것이 갑자기 내 것이 아니게 된 것처럼.

사실은 당연한 내 것이었다고 믿고 있었는지도 몰라.

아니야 분명 내 것이기도 해.     


직장인이라는 건 말이야

회사의 불법도 탈법도 조용히 눈 감는 것,

연말 보너스를 성급히 기대하지 않는 것,

기대했던 보너스가 없어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

호의와 권리를 확실히 구분하는 것,

그래서 X같은 회사라도 성급히 때려치우지 않는 것.     


그런 건가 봐, 어른이 된다는 건.  

올해를 보내면서 나는 또 한 겹 어른이 되어야 하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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