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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구마 Mar 01. 2022

덜 절망하겠다는 희망

차구마 일기

괜히 한번 책장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노트를 발견했다. 보아하니 예전에 메모장 겸 쓰던 일기장인 것 같다. 무얼 썼더라. 내가 나에게 호기심이 생겨 괜히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들춰본다. 아무래도 스물다섯의 나는 지금처럼 가끔 일기를 끼적인 모양인데, 어느 날은 이렇게 썼다.    


시답잖은 일기를 쓰는 일은 그만두겠다.

하루를 알알이 살아내어

한 편의 일기가 한 편의 작은 역사가 되는

그런 하루씩을 살아내겠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가 요상한 허세에 쩔어(?)있었구나.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그땐 그랬었다. 서둘러 노트를 덮는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저게 벌써 5년 전. 글쎄. 금수강산도 10년이면 변하고, 디지털의 하늘과 바다는 불과 1분 안에도 바뀐다는데. 만약 어떤 변화의 기록을 역사라고 정의한다면, 어쨌든 나는 강줄기나 산맥이 반쯤은 모습을 바꾼, 결코 짧지 않은 역사의 한 조각을 살아낸 셈이다. 어쩌면 저 낯간지러운 일기가 꽤나 그럴듯한 허세였던 거다.      


저맘때쯤, 몇 번의 밤, 나는 광화문에 있었다. 그 너른 광장을 꽉 메운, 얼굴을 가리지 않은 인파들 속에서 나도 나의 맨얼굴을 내놓고 있었다. 그 겨울은 분노였고 문화였고 축제였다. 밝지만 결연함이 깃든 모르는 얼굴들 사이에서, 왠지 모를 감격에 벅차올라 찌질하게 혼자 구석에서 훌쩍거렸던 기억. 그땐 우리가 무언가 해냈다고 자부했고, 세상이 바뀔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 자리에 모인, 서로를 모르는 많은 이가 나와 함께 확신했다.

  

그리고 5년이 흘렀다.    


세상은 분명 바뀌었다. 넘어야 할 큰 산과 무너뜨려야 할 두꺼운 벽은 여전하건만, 너무 빠른 변화가 만든 굴곡을 따라 크고 작고 가파른 언덕들이 새롭게 생겨났다. 그 사이사이로 나타난 평평한 들판과 흥미로운 오솔길도 간간이 눈에 띈다. 물론 바뀐 세상의 모양을 따라서 내 삶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긍정할 수만은 없지만 피할 수도 없고, 물론 나쁘지만 그렇다고 썩 끔찍한 것만도 아니라서, 이제 우리는 또 다른 누군가를, 또 다른 어떤 변화를 다시 한번 믿어주려 한다.      


대통령 선거다. 희망보다 절망에 가까워 보이는 선택의 시간이다. 인생의 여느 선택처럼, 불확실한 것들 중에서 덜 나쁜 것을 골라내야 한다. 믿을 만한 놈과 믿을 수 없는 놈을 구별해야 한다.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그래도 우리는 용기를 내어 덜 절망적일 누군가를 믿어보기로. 우리가 해냈다고 / 세상이 바뀔 거라고 / 그렇게 간절히 믿는 순간만큼은 감격하기도 벅차오르기도 하니까. 그리고 그 순간 덕분에 잠시나마 살맛이 솟아나기도 할 테니까. 덜 절망하겠다는 의지도 희망의 한 갈래일 테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서 최선을 선택하시길. 어렵고 절망적인 선택 후에도, 부디 모두 무탈하시길.


p.s 

여러모로 '역대급' 선거고, 나날이 최악이다. 이쯤 되면 선거를 두고 시민의 권리와 의무 운운하는 것도 미안한 일. '그래도 투표는 하자'는 말은, 그래서, 의무 이행으로써 서로 등을 떠미는 투표 독려가 아니라 연민으로써 서로 등을 다독이는 투표 격려에 가깝다. 어느 힘든 날, 우리의 손을 잡고 등을 토닥인 건 언제나 우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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