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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구마 Mar 29. 2022

우주먼지 탄신일

차구마 일기

오늘은 침착하다. 오늘도 침착하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순간순간 마음이 괜스레 들뜨기도 했지만, 그걸 깨닫는 순간 금세 다시 차분해졌으니까. 출근길은 평소와 다름없이 피곤했고, 점심 메뉴는 자주 가는 순댓국집이었고, 퇴근 시간 지하철은 붐볐다. 그래서 대부분 몰랐겠지. 오늘은 거대한 우주 속 먼지 같은 행성에서 한참 더 작은 먼지 같은 생명체가 탄생한 우주적 기념일이라는 걸. 내가 태어난 날, 아마 30년 전의 지구도 오늘과 같은 자리에서 무던히 태양을 마주하며 푸른빛을 뿜고 있었을 테다. 기쁘다 우주먼지 오셨네!      


오늘 하루 내 핸드폰에 몇 통의 축하 메시지가 다녀갔다. 그 애정들이 내게 너무 과분하다고도, 또 약간 부족하다고도 느낀다. 이런 이중적인 마음은 아마도 지극히 데이터적인 산물일 테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마음속엔 이미 축하받을 이들의 리스트가 만들어져 있었고, 관계의 거리와 깊이와 주고받은 물질적 교환과 정신적 소통의 통계를 기반으로 작성됐을 그 리스트는 약간의 오차만 있었을 뿐 대체로 정확했다. 몇 번의 개인 카톡이 오고, 몇 개의 기프티콘을 받고, 단체 채팅방 메시지가 얕게 쌓인다. 생일을 서른 번쯤 겪으며 축적한 경험치 덕에 이제는 설렘도 서운함도 덜하게 됐지만, 저녁 9시 반 깨 마지막으로 도착한 짧은 축하 메시지를 끝으로 쿨한 척 곰곰이 톺아보며 뒤끝을 쌓아놓는 일 또한 어쩔 수 없는 것. 이봐, 너는 왜 연락 안 해줬어?     


와야 할 연락이 오지 않고, 오지 않아도 됐을 연락이 문득 찾아온다. 우주적 먼지가 우주적 먼지들 사이에 부대끼며 쌓은 것들이 오늘은 날것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너는 나 좋아? 나는 너 좋았는데, 따위의 신호들. 총체적 안정감 속에서 호불호가 명확한 당혹감들 또한 여러 차례 교차하던, 괜히 길게 느껴졌던 하루를 마친다. 아무것도 아닌 날이지만 실은 또 그만큼 대단한 날. 먼지적 몸부림을 평가받는 날로서의 생일이 끝나가는 밤. 올해의 나는 여전히 찌질하지만 일단은 그저 감사하. 귀찮음을 무릅쓰고 기꺼이 손가락을 움직여 메시지를 남겨주신 분들에게, 그 마음에, 엄지 관절보다 유연하게 척추를 어 인사를 건넨다. 당신에게 없어선 안 될 사람은 도저히 되어줄 자신이 없으나, 좋은 날 겸연쩍게 축하해주고 멋쩍게 축하받을 사이를 향해, 슬픈 날 작고 어설픈 위로가 되어줄 관계를 향해, 그렇게 나를 닮은 먼지적 당신들을 향해 덤덤히 가기로 다짐하면서, 생일 끝.

      

p.s 어릴 땐 생일이 돌아오면 한 뼘 더 자라 있었을 텐데, 요즘은 생일이 다가올 때면 어쩐지 전보다 조금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음 생일엔 늘어나고 길어지는 초를 불면서 진심으로 빌어야겠다. 정말, 근사한 우주먼지가 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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