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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구마 Dec 06. 2022

2022.12.06 겨울, 오후엔 맑음

문밖을 나서면 차갑게 벼르고 있던 공기를 코끝으로 먼저 만난다. 얼굴에서 퍼지기 시작한 추위가 발끝까지 타고 내려가도록 조금 걷는다. 햇살은 아직 약간의 따뜻함을 간직한 채 둥글게 퍼져있고,  콧잔등을 긁으면 코피가 쏟아질 듯 건조한 바람이 파고든다. 12월의 차가운 한기가 몸을 얼릴 정도의 시린 냉기에 이르지 못하는 까닭은 빈약한 다리를 감싼 채 바지 아래 꼭꼭 숨어있는 타이즈 한 장 덕분. 얇디얇은 것의 두툼한 존재감에 새삼 감사를 느끼며, 같은 속도로 나는 걷는다. 서른 번 남짓한 나의 겨울이 지구를 돌다가 내 앞에 도착하는 매년 이맘때, 겨울의 보폭에 내 발자국을 맞추면 얼굴 발갛게 달아오른다. 제각각 발개진 얼굴들이 묵묵하게 오가는 회색 거리는 깨끗하다. 누구도 누군가의 발개진 얼굴에 인사를 건네지 않으며 걷는다.


전철역에 도착하면 두꺼운 벽이 바람을 내쫓는다. 바람은 침을 뱉듯 차가움 몇 줄기만 던져두고 왔던 길을 따라 떠난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전철은 제시간에 내 앞에 선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나는 제시간에 전철 앞에 멈춘다. 숨 막힐 듯 촘촘한 일상은 오히려 어떤 안온함을 선물하고, 나는 선물을 풀어보듯 단단해진 얼굴과 몸을 얼른 전철에 싣는다. 일상은 아주 작은 조각들을 이어붙인 하나의 큰 덩어리 같아서, 조각 몇 개 빠지고 틀어져도 모양은 무너지지 않은 채 하루가 간다. 오늘 나의 작은 조각은 점심으로 김치찌개를 먹을지 돈까스를 먹을지 하는 고민.  따뜻한 라떼를 마실까 마을버스 하나를 놓칠까 하는 사소한 고민들. 작은 굉음이 적막을 가르면 열차는 간다. 열차가 공기를 찢고 움직인다. 크고 묵직한 일상이 천천히 움직인다.


오래 못 봤던 친구들을 만났고, 흥미로운 누군가의 안부를 물었고, 그럭저럭한 나의 안녕을 전했다. 발이 시려운 날 마음 따뜻한 이들과 술잔 앞에서 한숨을 자주 쉬었고, 안주를 많이 집어먹어 속이 든든했다. 한국 축구는 기적처럼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후 브라질에게 졌으며, 새벽까지 응원을 한 후에는 들뜬 마음으로 조금 잤다. 빛나는 글들을 읽고 영화를 몇 편 봤다. 요 며칠의 일. 요즘은 이렇게 가난하고 흥미로운 하루를 보낸다. 하루가 매년 찾아오는 겨울과 비슷한 속도로 느리게 걷는 느낌. 가끔 반가운 마음이 벅차서 마치 뭐라도 된 것마냥, 무언가라도 해낸 것마냥, 조금 부푼 일상을 보냈다가, 금세 다시 가라앉기. 이건 차가운 겨울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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