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구마 Jan 10. 2021

새해는 냉정하게 온다

차구마 일기 19


할 일 미루기가 전공이고, 딴짓하기가 주특기다. '오늘만 산다'라고 생각해본 적 없으니 원빈처럼 멋있었을 리 없고, '내일이 없다'고도 생각해본 적 없으니 특별히 간절한 하루를 보낸 기억도 없다. 그렇게 미루고 피하고 비껴가다 보니 벌써 한 해 하고도 일주일이 더 지났다. 어김없이 나이가 늘었다.

 숫자는 언제나 정확하고 대체로 정직하다. 숫자를 좋아하는 이들은 그 정확성을 사랑하지만, 숫자를 싫어하는 이들은 그 정직성에 체념한다. 나는 숫자를 (격렬히) 싫어하므로, 매년 이맘때면 엄격한 숫자 앞에서 체념한 채 재판을 받는 기분이다. 나는 해마다 거르는 법 없이 내게 날아드는, 냉정한 숫자가 빼곡한 공소장을 받아 든다. 예를 들면 이런 식.



<공소장>


1편.

-하루에 한 편씩 글을 썼는가. 일기든 뭐든.

피고 측 변론,

피고는 전업 작가가 아님. 생각이 안 나는 걸 억지로 쓸 수 없음. (그래, 생각을 하긴 해봤나?)

다작(多作) 보다는 양질의 글 한 편이 가치 있다고 생각함. (그래서, 그런 좋은 글은 썼고?) 


5일.

-주 5일은 최선을 다해 살았는가? 그래서 주말에 푹 쉬는 일에 죄책감은 없었는가?

피고 측 변론,

주말에 푹 쉬는 게 첫 번째 원칙. 그래야 주중에 열심히 살 수 있는 것.

이틀을 위해 5일을 산다는 건 너무 아까우니, 5일을 위해 이틀을 최선을 다해 쉰 것뿐.

(그러다 보니 때론 '5일'에 소홀했을 수도.) 


6시간.

-지난해 목표한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을 지켰는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잡는다. 

피고 측 변론,

일찍 일어나는 새는 멍하고 피곤함. (일찍은 일어났으나 낮잠을 자주 때려 잤음.)

나만의 바이오리듬을 찾는 일이 중요했음. (그래서 주말에 12시간 몰아서 자기.)


19-코로나.

-뜻밖의 전염병, 철저한 방역수칙을 준수하였나. 혹은 그걸 핑계로 소홀했던 일은 없었는가.

피고 측 변론,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등 개인 방역 수칙 철저하게 준수. 

다만 자기계발에 투자할 여건 조성이 어려웠음.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야. 후후.)

언택트 시대라서 사람 챙기기도 어려웠음.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지. 후후.)


24권.

-지난해의 독서 목표, 한 달에 두 권씩, 총 스물네 권 이상 읽었는가.

피고 측 변론,

아마도 소설 몇 권, 인문서 몇 권, 읽었던 책 다시 읽기로 몇 권이 전부. (중도 포기 과학도서 1권 포함.)

퇴근 후 씻고 밥 먹고 나면 오롯이 독서에 집중할 시간이 부족했음. (자기 전에 유튜브도 좀 봐야 했음.)


- 이상의 사안들에 대한 판결을 신청함. 



엄숙히 선서한 후에 답해야 할 질문들. 유죄냐 무죄냐의 문제가 아니다. 유죄는 이미 확정이되 얼마만큼 잘못했느냐, 그것을 가리는 치열한 싸움이 될 테다. 여기저기 명백한 잘못의 증거들, 그리고 가까스로 남아있는 노력의 흔적들. 스스로를 기소하고, 변론하고, 구형하고, 감형하는 피곤한 공방전의 시간. 이 시간이 끝나면 아마도 우리는 대부분 집행유예를 받을 거고, 그렇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새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하겠지. 아마도 얼마간은 지켜질, 그리고 금세 무너질 우리의 선서. "새해에는 차.카.게 살자"    

 

'새해'가 알아서 날 끌어주거나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내가 나를, 서로가 서로를, 잘 끌어주고 지켜주며 가야 한다는 것. 매년 새해가 올 때마다 깨닫고 매년 한 해가 가기 전에 잊는 사실들이다. 그리고 새해가 오면 우린 다시 주문처럼 이렇게 중얼거리겠지. '새해에는 더 잘', '새해에는 꼭.' 그렇게 자신에게 건네는 안쓰러운 위로. 냉정한 숫자 앞에서 그래도 머무는 따뜻한 연민. 

 이제 새해에 대해선 그만 써야겠다. 그렇게 애타게 찾던 새해도 벌써 한 뼘 지나 서서히 낡아가기 시작했으니. 올해도 시간은 속절없이 가겠지만, 그래도 공평한 숫자 앞에 새해를 맞이한 모든 이들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며, 오늘은 잠시 멈춰서 쓴다. '새해에는 더 잘' 행복하기, '새해에는 꼭' 행복하기. 

매거진의 이전글 뼈를 맞았다, 아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