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
대로변에는 앙상하게 잎이 떨어진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겨울 혹한기의 칼바람이 매섭게 불어와 나뭇가지를 흔들었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나무들은 꺾일 듯 휘어졌다가도 다시 꿋꿋이 서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깃든 가지들 사이로 바람에 흩날리는 작은 먼지와 낙엽 조각들이 춤을 추듯 흩어졌고, 대로변의 공기는 무겁고도 쓸쓸했다.
인적이 드문 길거리에는 바람이 쌩쌩 지나가는 소리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자동차 소음만이 겨울밤의 적막을 깨뜨리고 있었으며, 겨울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별조차 보이지 않았고, 달빛마저 흐릿해 주변 풍경은 더욱 고요하고 쓸쓸해 보였다.
유진은 두터운 외투를 여미며 걷고 있었지만,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싸늘한 공기에 마음까지 시려왔다. 얼굴과 귀, 코끝이 빨갛게 얼어붙었지만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유진은 걷고 또 걸었다.
외투 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계속 울렸고 이제서야 그걸 알아 차린듯 유진은 꽁꽁 언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어보세요?" "유진아! 어디야?" 도훈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지금 어다야? 내가 데리러 갈께."
유진은 도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다급해지자 겨우 입을 열었다.
"도훈씨... 나... 그냥... 걷고 있어." 유진은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냥... 나가고 싶었어."
도훈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급히 다시 물었다.
"유진아, 지금 너무 위험해. 주변 큰 빌딩이나 상호가 보이면 말해. 내가 지금 바로 너를 데리러 갈게."
"괜찮아, 도훈씨..." 유진은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갈께."
도훈은 유진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이해했지만, 그녀가 혼자 있는 것보다 자신이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유진아, 혼자 있으면 더 힘들 거야. 내가 갈 테니까 기다려. 거기 그대로 있어. 지금 바로 나갈게."
도훈은 곧장 전화를 끊고, 급히 차를 몰아 유진을 찾으러 나섰다. 유진은 차가운 바람 속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겨울 하늘 아래, 그녀의 마음은 온통 혼란과 쓸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몇 분 뒤, 도훈의 차가 유진이 서 있던 대로변에 도달했다. 도훈은 차에서 내려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진의 손을 끌었다.
유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차에 올라탔다. 한동은 도훈은 말이 없었다. 화가 난 듯 보였다가 유진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서 참는것 처럼 보였다가 또 한편으로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보였다.
아니, 어쩌면 그의 표정은 화가 난 듯 보였지만, 그보다는 유진의 상태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몇 번이고 입을 열려 했지만, 그가 말을 꺼내지 못한 건 유진이 더 힘들게 느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으리라.
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흐릿하게 보이는 도시의 불빛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마음속엔 엄마의 모습과, 그동안의 가족과의 복잡한 관계들이 얽히며 뒤엉켜 있었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도훈이 차를 한쪽 도로 옆에 세우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아..." 그의 목소리는 전보다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걱정이 묻어났다. "그렇게 혼자 있으면 안 돼. 나한테 말해, 네가 뭘 겪고 있는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나도 모르게 네가 계속 혼자 있을까 봐..."
유진은 그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도훈씨... 나 혼자서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점점 더 힘들어져서. 저 사람이 엄마가 아니라면... 우리 엄마는 누구인지? 나는 사진한장도 없는데... 엄마 얼굴도 모르는데... 나는 왜 공포스런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동시에 왜 자상한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는지...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달려 왔는지... 그리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겨우 엄마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혼란스러워."
도훈은 유진의 말을 듣고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니, 자신도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생각에 답답해졌다. 하지만, 그는 다시 고개를 들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유진아, 네가 느끼는 혼란이 얼마나 큰지, 나도 알아. 하지만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려 하지 말아. 내가 여기 있을게. 정민이도 돕고 있잖아. 우리 둘이 함께 이 상황을 풀어나갈 수 있을 거야."
유진은 도훈의 말에 조금 안도하며, 그래도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불안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때 도훈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홍선숙이 너한테 그렇게 말한 이유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그게 너에게 중요한 부분일 수 있어.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걸 한꺼번에 알 필요는 없어. 중요한 건 네가 혼자가 아니라는 거야. 내가 있고, 정민이도 있고. 우리는 언제나 너의 편이야."
그 말에 유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도훈의 따뜻한 말들이 조금씩 그녀의 마음을 녹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도훈씨..." 유진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조금 더 기다려 볼게요. 나도... 나만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도훈은 미소를 지으며 운전대를 잡고, 다시 길을 떠났다. 그들은 말없이 도로를 따라 달렸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도시의 불빛들이 유진에게 조금이나마 안식을 주는 듯했다. 이제 그녀는 조금씩 마음을 추스르며,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