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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드릴 Mar 26. 2020

여행지에서 보내는 편지



 참 이상한 일이지.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마음은 다툼이 잦아든 후에 찾아온다니. 정작 이해해야 하는 순간에는 아픈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줘버리니까 말이야.


 카페에 앉아 어제 일을 떠올리면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비웠어.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날은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어. 저녁 9시. 카페 창문으로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였어. 자동차 앞에 젊은 연인이 서 있었어. 모자를 쓴 남자가 우유부단하게 우산을 폈다 접었다 하자, 단발머리의 여자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몸을 돌리다가 우산을 쓴 여자와 부딪혔어. 우산을 쓴 여자는 우울하고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며 걷다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들었는데, 앞치마를 두른 카페 사장이 담배를 피우고 있기 때문이었어. 나는 딸랑거리는 카페 도어벨 소리와 함께 희미한 담배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지. 문득 내가 카페에 마지막으로 남은 손님이라는 걸 깨달은 거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퇴근한다는 문자를 보낸 지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네가 오기까지는 꽤 시간이 남았어. 내 여행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남았지. 두 달 가량이 남았으니 말이야.


 문득 여행지에서 너에게 편지를 쓰면 어떨까 생각을 했어. 하루에 편지 하나씩. 매일 부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야.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고 생각하겠지? 호언장담하고 샀던 일기장도 한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때려치우기 일쑤인 나니까,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누군가를 오랫동안 사귈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나니까.


 나는 꽤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이 주 동안 열차만 타야 하는 여행이니까 넘치는 게 시간 아닐까. 그 시간 동안 너를 위한 여유를 내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 참 이상하지. 여행을 가든 가지 않든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데 여행을 간다는 이유만으로 시간이 많아지는 기분이 든다는 게. 우리는 중요한 일이 많다는 핑계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오래 사귄 연인은 지레 그렇다는 핑계로, 행복할 수 있었던 시간을 회피해 온 걸지도 몰라.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것도 시간인 걸까. 우리의 기분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들다가 하는, 제멋대로인 시간.


 사실 나는 여행을 간다고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된다던가, 특별한 뭔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기대는 하지 않아.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여행이니까,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행자인 셈이지. 먼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면 마주치지 않았을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고, 이별하는 과정을 경험해보고 싶을 뿐이야. 그리고 완전히 홀로인 시간을 가지고 싶을 뿐이야.


 네가 함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은 여행하는 동안 계속 들 것 같아. 나는 항상 너와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싶었으니까.


 빗줄기가 잦아든다. 너는 아직 창가에서 보이지 않아.


 어제 너와 싸우고는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어. 나는 한참 동안 멍청하게 길 한가운데에 서 있었어. 길가의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도 없이 각자의 문제에 사로잡혀서 앞만을 바라보고 걸어가고 있었어. 카페 안의 풍경을 들여다보니 창문에 김이 뿌옇게 서려 있어서 따스한 삶의 온기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았어.


 사무치게 외로웠어.


 어제의 우리는 왜 싸웠던 걸까? 지금 생각해보면 사소한 이유였지만 어제는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던 거지. 사랑하는 너는 말하지 않아도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줄 거라고, 그렇게 막연하게 믿었던 거야. 


 우리가 싸웠던 어제 저녁, 나는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라고 했고, 너는 언제까지 똑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냐고 했지. 나는 갈비탕을 데웠고 너는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지. 나는 너에게 청소는 밥 먹고 하라고 얘기했어. 너는 대답하지 않았어. 시위하듯이 말이야. 나는 묵묵히 바라보았지. 네가 부엌 옆 쓰레기통에서 청소기를 분해해서 먼지를 털고 있는 모습을 말이야. 갈비탕은 식어갔지만, 머리는 밥솥 뚜껑처럼 뜨거워졌지.


 나는 갈비탕을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버리겠다고 말했어. 노란 봉투를 벌리고 접시 안에 있는 내용물을 들어부으려다가 도로 접시를 내려놓았어. 너를 위해 만들어준 거니 알아서 처분하라고 쏘아붙이듯이 말했어. 그때의 나는 흥분해서 눈먼 소처럼 아무 곳에나 머리를 들이받고 있는 형편이었지.


 나는 잠바를 입고 거리로 뛰쳐나왔어.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목적도 없는 외출이었지. 물론 화는 금방 풀렸어. 네 행동에 대해 성숙한 태도로 납득했다기보다는, 비도 내리고 춥고 어디 들어가기도 귀찮고 카페 들어가기는 돈이 아깝더라고. 집은 들어가야 되는데 그러려면 화가 풀려야 되잖아. 


 부스스한 머리에 수면 바지를 입고 동네 마트를 거닐면서 네가 왜 화가 났을지 생각해봤어. 이해를 해보려고 해도, 네가 잘못한 것 같았어. 사과를 하려고 해도, 미숙한 변명이 나를 가로막았어.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었던 걸까? 맞춰갔던 순간들은 당연한 것이 되고, 안 맞는 점들은 당연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 채, 각자의 시선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야. 분노가 쓸려나간 자리에는 한 가지 질문만이 남았어.


 나는 아직 너를 사랑하는가?


 집에 돌아와 문을 여니까 갈비탕은 식탁 위에 그대로 있었어. 너는 의자에 앉아 있었어. 약간 어리벙벙해 있었던 것 같기도 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을 하고. 나도 내 감정선을 따라가지 못할 때가 많은데 한 템포 느린 편인 너는 더 그랬겠지.


 신파극의 막은 내리고 우리는 화해했어. 배가 고팠고 갈비탕도 빨리 해치워야 했으니까. 너는 갈비탕이 맛있다고 연신 칭찬했어. 너 나름의 미안함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던 모양이야. 배가 부르니 기분이 좋아져서 방금 전에 있었던 일들도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었지.


 네가 왜 갑자기 집을 뛰쳐나갔냐고 물어봤는데, 사실 나도 모르겠어. 너도 알잖아. 원래 막장 신파극의 주인공에게 행동의 이유 같은 걸 물으면 안 돼.


 가장 이해가 필요한 순간에는 서로의 미숙한 부분이 툭툭 튀어나오고 마는 것이 관계의 숙명인가 싶어. 옛날에 비해 성숙해졌구나, 나름 오만한 결론을 내는 순간에 뒤통수를 맞고 마는 거야. 하지만 지금 카페에 앉아 있는 나는 함께 쌓아온 행복한 추억을 되새기며 우리의 관계에 켜켜이 층을 쌓아 올리고 마는 거야.


 생각해보면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 우리는 항상 함께 여행했지. 오키나와, 오사카, 교토, 전주. 물론 서울에서는 더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웃고 싸웠던 순간을 거쳐서 이제 조금은 너와 같은 풍경을 보고 있는 걸까? 그 수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득 여행지에서 홀로 있는 순간에도 외롭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눈은 사진기와 같잖아. 나는 모든 풍경을 눈에 담을 거야. 기억하고 때로 잊어버릴 거야.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풍경은 글로 적을 거야. 홀로 간직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말해주기 위하여. 가장 소중한 풍경은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간직했다가, 여행지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여는 순간에 나를 반기는 너의 손을 잡으며 잠바도 미처 벗지 않은 채로 말해주고 싶어. 나와 같은 풍경을 보지 않은 너에게.


 이제 네가 올 시간이 머지않은 것 같다. 아까부터 너를 기다리며 창문을 바라보고 있어. 편지를 쓴다는 건 나쁘지 않은 계획이지? 아직 비가 내리고 있어. 네가 우산을 들고 오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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