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알라룸푸르 첫 필름 (2)

바로 이어서 찍었던 두 번째 필름, 그 사이의 간극

by 대숲사진가
불과 한롤 사이에 많은 게 바뀌어 있었다.
시간도, 사진의 분위기도, 그리고 셔터 뒤의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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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iwangsa 호수 공원 가던 길


첫번째 현상소 방문에 맡겼던 필름은 총 두롤이었는데, 두 번째 롤은 첫 번째 롤에서 곧바로 이어지고 있었다. 집을 구하고 첫 주말, 날씨가 대단히 좋았다. 느지막하게 아침 햇살을 맞으며 눈을 뜬 나는 집도 구했겠다, 슬슬 어딘가로 돌아다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간단한 아침을 먹고 롤라이 35를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이 날의 행선지는 티티왕사(Titiwangsa) 호수공원이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이 날의 하늘이 마음에 들었고, 탁 트인 개방감이 더해진 채 이 하늘을 만끽하고 싶었다. 또한 회사 트레이닝 기간을 같이 보냈던 베트남 친구들이 이곳으로 피크닉을 다녀왔단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던 것도 한 몫했다.


굳이 옥에 티를 꼽자면 앞선 필름이 몇 장이 남지 않아, 티티왕사까지 걸어가던 길 중간에 앞 필름이 끝나 버렸다는 것이었다. '아 이렇게 중간에 끊기는 거 정말 별로인데'라며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선택지는 없으니까 이럴 땐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 (원래 난 같은 시공간에서 필름 한롤이 깔끔하게 끊기는 것을 좋아한다.)


티티왕사 공원은 월요일 이른 오후여서 그런지, 원래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그랬는지는 몰라도 한산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하늘이 쾌청과 흐림을 오고 가고 있었기 때문에, KL타워와 페트로나스타워가 한눈에 보이는 뷰포인트에 도착했을 때는 하늘이 조금 흐려져 있을 때쯤이었다. 지나가는 구름 떼와 나 자신이 내는 엇박자가 조금 얄미울 정도였지만, 사진에는 담기지 못한 사람 없는 이 공원이 주는 청량감을 만끽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족하는 마음으로 느지막이 셔터를 눌렀다. 롤라이 35 특유의 맥없이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의 셔터소리가 울렸다. 이후 받아본 현상물이 내가 생각한 그곳의 공간감과 색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필름이 만들어낸 이 색에 만족감과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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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필름에는 이 날의 다음 동선이 따라 나왔다. 티티왕사 공원에서 이미 땀에 흠뻑 젖을 만큼 걷다가 간신히 공원을 빠져나온 나는 기왕 나온 하루가 좀 아깝다는 마음에, 모노레일 역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초우킷 (Chow Kit) 시장을 함께 들려보기로 했다.


시장은 사실 평일 오전 이른 시간에 열고, 오후 2시가 되기 전에 대부분 닫는다고 했다. 내가 갔을 때 역시 대부분의 가판대들이 문을 닫고 있거나 한창 막바지 정리를 하고 있던 시기였다. 외국인들의 발걸음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조금은 구석진 분위기가 많아 본능적인 두려움이 자리하면서도 '언젠가는 이곳에도 한번 과일을 사러 와봐야겠다'하고 다짐했던 나였지만, 이 날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지금의 나는 Jaya Grocer나, MBG와 같이 대형마트에서 과일을 사 먹고 있다. 새삼 다시 한번은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초우킷 시장은 이 도시 쿠알라룸푸르에서 볼 수 있는 삶의 치열함이라는 키워드가 다른 모습으로 구현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회사가 있는 KL Sentral에서는 직장인들의 바쁜 현대인으로서의 면모가 돋보인다면 이곳에서는 하루하루를 무사히 팔고, 그날의 생계를 유지하겠다는 간절함과 처절함이 보이는 곳이었다. 물론 이 동네의 구석진 곳에서 밤늦은 시간대에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난 초우킷을 둘러보며 그것들을 유심히 보고, 기억에 남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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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마음에 들었던 사진 중 하나. 초우킷 길거리에서 장기를 두던 어르신들이었다. 나이 들었을 때의 삶과 모습은 어떨지를 요즘 자주 생각해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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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찍은 이후로 초우킷을 한번도 가지 않았다.


초우킷 이후의 사진들부터는 그 사이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의 사진이었다. 바쁘다는 핑계가 있었고, 한동안은 운동에 전념하느라 운동 가방에 미처 카메라까지 허락할 만큼 충분한 공간이 없다는 허울 좋은 이유도 존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록의 시곗바늘은 내가 신발 수선을 맡기겠다고 Sunway Velocity 쇼핑몰을 가던 날에 잠시 멈춰 있었다.


이 날 하루의 결말은 사실 '신발 수선도 못 맡기고 허탕만 쳤다'라는 결말이었지만, 사진 속 기록에 남은 메시지는 그와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내가 쇼핑몰 근처의 전철역에서 내리자마자 본 것은 다소 허름한 아파트 단지가 이루고 있는 메마르고 거칠고 건조해보기 짝이 없는 건물들의 숲이었다. 집을 구하고 다니던 불과 얼마 전의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집을 구하는 조건 필터링에서 이런 집들은 아예 고려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 그리고 이곳에서 사는 이들을 생각하자니 그런 생각은 또 얼마나 오만했을까 라는 생각 등을 하며 한동안 역 승강장에서 보이는 이 건물들의 숲을 응시했다. 건물들 사이로 Sunway mall이 멀리 보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쯤 그제야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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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way에서 나올 때쯤부터는 동선의 변화가 악보 위의 아첼레란도(점점 빠르게)처럼 훅훅 지나가기 시작했다. 필시 내가 시간대별로 계속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는데, 명확하게도 그것은 이 날 하늘의 변화였다. 사실 이 필름 롤의 가장 불만이었던 부분이었지만, 이 날 사용한 필름 + 롤라이 35의 조합이 색감의 강렬함을 좀 잡아먹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Sunway에서 나와서 전철역으로 다시 걸어가던 순간 찍었던 사진부터 곧바로 그 생각이 들었다. 혹은 너무 들뜬 마음에 살짝 오버노출이 난 것이 원인이었을지도 몰랐다. 늘 이렇다. 들뜬 마음은 언제나 세밀함을 그르치곤 한다.


하지만 해가 떨어지기 직전인 순간까지 다다라 Hang Tuah 쯤에서 셔터를 다시 누를 때쯤에는 손에 쥐어진 게 '뭔들' 들' 싶을 만큼 훌륭한 하늘이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하기만 하면 되었다. 결국 그럼에도 모든 것을 포용할 만큼의 완벽한 순간은 찾아오니까, 다만 그 순간에 미리 준비된 채로 가 있는 것이 나의 몫이라는 생각을 다시 했다. 시간대 별로 집까지 오는 길을 즐기고, 마지막으로 여명의 한줄기가 남아 있는 마지막 순간은 집 테라스에 도착해 느긋하게 마무리를 해보며 또 필름의 중간에 쉼표를 한번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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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해 테라스에서 보이는게 이런 뷰면 하루의 피로가 다 풀린다.


필름의 후반부에는 앞선 기록들보다는 훨씬 더 여유가 있고 경쾌함이 느껴지는 기록들이었다. 몽키아라에서 마음에 들었던 카페의 모습, 다시 KLCC 쪽으로 돌아오며 탔던 버스에서 느껴지는 한산함과 여유를 한눈에 기억해 냈다. 필름 속 시간이 점점 무르익어 갈수록 기록의 풍성함도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늘 믿고 있는 것 중 하나에 '기록은 필연적으로 기록자의 감정과 상태를 반영한다'가 있는데, 그 점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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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변화를 확신한 것은 두 장의 몽키아라 사진들을 뛰어넘자 마지막 시공간으로 다다른 곳이 차이나타운과 센트럴 마켓이었기 때문이다. 난 아직 이 장소들을 쉬는 날 처음 갔을 때의 기분을 기억한다. 외국인과 관광객들로 가득한 공간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이 시점의 나에게는 새롭고 모험하는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 첫 만남과 설렘의 감정이 그대로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고, 이 날의 날씨도 완벽했다.


기록의 질과 양을 떠나, 이곳에서의 삶을 이야기함에 있어 서사적으로 완벽한 조각이 되는 이 필름은 그 마무리마저도 훌륭한 것이, 마지막 컷 끝 부분이 잘려나가 나머지 부분은 검은색 공백으로 남아 있었고, 마지막에서 바로 전 사진의 일부가 잘린 채 마지막 사진에 함께 붙어 있었다.


필름 한롤이 깔끔하게 끊기는 것을 좋아하던 나였지만, 필름 한롤 약 36장 + @ 남짓한 분량에 그 모든 시간과, 그 시간 속을 달리는 나라는 매개체의 직접적인 변화를 그대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필름이었다. 무엇보다도, 정제된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한이 이유가 되어 사진을 시작했던 나였다는 점을 다시 상기하면, 이렇게 기억의 구석구석을 다시 되새김질하며 현재와 미래를 향해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었다. 그렇게 필름을 마무리하며 계속 현생의 필름을 나는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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