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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숲사진가 May 25. 2022

비가 지나갔다 (남해 EP.2)

어느 순간 올려다보면 비는 지나가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창문을 쉼 없이 두들기는 비바람 소리에 잠깐 잠이 깬 것은.

남해 다랭이 마을 민박집에서 청한 첫 밤에는 비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자다가 새벽에 잠결에 잠깐 눈을 반쯤 떴던 내가 듣고 있던 것은 민박집 유리창을 거세게 두들기고 있던 비바람 소리였다. 우리 집의 내 방은 빗소리를 듣기 어려운 구조였기에, 이렇게 거칠고 선명한 빗소리에 잠이 깨본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여행지 민박에서 분위기 좀 내보겠다고 오랜만에 거하게 대작을 하자며 나섰다가 내가 못이긴 채 그냥 잠이 들었다는 기억이 뒤이어 날아들었다. 주변이 의외로 깨끗하게 치워진 것을 얼핏 보아하니 그래도 창이 다 치워주고 자리에 누운 모양이었다. 상황 파악이 그쯤 되었으면 사서 걱정하기로는 수위를 다투는 내가 걱정들이 와르르 몰려올 시간이었다. '여행 사진 욕심 내는 입장에서 그래도 날씨가 맑아야할텐데.' 라거나 '비가 계속 오면 뭘 해야할까.' 등의 걱정들이 평소 같으면 밀려올텐데, 이상하게 걱정이 없었다. 그냥 그 순간의 빗소리가 듣기 좋았다는 생각을 해보며 다시 눈을 감았다.



한바탕 비가 지나간 다음날 아침의 다랭이 마을


늦잠을 실컷 자고 일어나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고요함이 흐르고 있는 민박집의 여닫이 문이었다. 별 것 아닌 장면이지만 다들 그런 장면 하나쯤은 생각하지 않는가. 아침에 늦잠을 자고 눈을 뜨고 여닫이 문을 스르륵 열었을 때 중천에 뜬 해가 빛을 내 얼굴 위로 내리 뿌려주는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있는 그 장면. 그 순간이 딱 그런 장면이었다. 살짝 먹먹한 구름들이 아직 하늘 위에 덮여 해를 마주할 수 없었지만 비가 완전히 개였다.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갈 시간이었다.


다랭이 마을의 계단식 논들에는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유채꽃을 심지 않은 곳들에는 주로 파를 심는데, 이 파들이 자라나며 피워내는 푸릇함이 유채꽃들과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유채꽃이라는 오브제가 나에게 주는 의미란 오롯한 나만을 위한 봄을 위해 떠나왔음의 끝에서 마주한 결과물이었다. 언제나 바빴던 봄을 나만의 휴식을 위해 드디어 보러 왔다는 사실에, 그간 늘 반복 되어 오던 봄이 아닌 '새로운 봄'이구나 라는 사실에 벅차 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남해에서 맞은 첫 아침은 그렇게 깊고 은은하게 마음을 적셨다.


다랭이 마을에서 굳이 숙박을 해야할 필요가 있냐고 묻는다면 난 꼭 해보라고 말하고 싶다.
어딜 가나 바다가 주는 깊은 푸르른 빛의 에너지도 받을 수 있다. 좋은 카페들도 군데군데 숨어 있으니 가본다면 찾아보시길


나의 MBTI는 ENFJ이다. J가 들어 갔으니 계획형 인간이란 뜻이고 나와 상당수 일치하는 이야기이다. 다만 여행지에서만큼은 '각각의 시간대들을 미리 규정' 하는 행위를 싫어한다. 여행을 시간대 별로 쪼개서 이 시간대에는 반드시 그것들을 해야한다는 계획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는 이야기이다. 때로는 비효율적이어도 괜찮고, 때로는 시간이 빠르거나 느리게 흘러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교통편과 숙소들 정도만 정해두고 가고 싶은 장소들만 지도에 핀으로 찍어둔다. 이런 방식이 모두에게 정답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지금까지의 나에게는 '나만의 정답' 이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지금 회상해 보건데, 여행 둘째 날이었던 이 날도 시간대별로 동선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 속 우리의 발걸음들에 내포된 장소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남해는 이렇게 달리는 시간이 아닌 장소와 모먼트로 기억하기에 정말 좋은 여행지였다고 자부한다. 그 장소와 모먼트들에는 '남해 여행' 이나 '남해 명소' 등의 키워드로 검색했을 때 나오지 않는 장소들도 존재했는데, 해안 절벽 도로들이 대다수인 남해는 길을 달리다 이름 모를 아무 지점에나 차를 세워도 남해안 일대와 그 앞에 펼쳐진 주민들의 삶이 어우러진 비경을 쉽게 감상할 수 있다. 상주은모래해변이나 보리암의 경관도 나는 너무나 좋았지만 그들을 향해 가는 과정 또한 너무나 좋았다.


이 장소들만으로 남해를 모두 설명할 순 없다


종착지가 아닌 '과정'에서 마주했던 순간들도 귀했다


그래서 그 '과정'의 일부였던 보리암을 가기 전에 들렸던 두모마을의 이야기도 빼놓고 갈 수가 없겠다. 특별한 관광지는 아니었지만 남해 여행 전에 지도를 보다가 깊게 패인 만의 양옆으로 자리 잡은 민가들이 줄지은 마을을 보고 '아 이 곳은 관광지가 아니지만 반드시 들려서 보고가야겠다.' 라고 출발전부터 벼르던 곳이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 을 봤던 사람이라면 작중 곤도르의 도시 '오스길리아스'와 약간은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면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 한다.

"어디서든 들려와 귀를 기울이면"

남해대로를 타다 중간에 나오는 마을 초입에서부터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는 것만 같은 급경사길이 시작된다. 점점 들어갈수록 마을의 사이를 가르는 바다를 볼 수 있으며 시골 마을에서 으레 보이는 작은 다리, 그리고 그 뒤로 걸리는 뭉게구름들이 보인다. 이곳에 이 풍경을 보러가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여자친구의 <귀를 기울이면> 이라는 노래를 꼭 같이 들어보며 걸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팬심을 빼고서라도 이 곳의 이 상황과 무드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어디서든 들려와 귀를 기울이면" 이라는 가사답게 바닷소리를 계속 들을 수 있으며 "반짝반짝 빛나던 너의 눈동자처럼"과 같이 바닷물에 부딛히며 반짝거리는 윤슬이 아름답다. 만약 남해에 다시 방문 했을 때 다랭이 마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숙박을 하라고 한다면 난 주저 없이 이곳을 고를 것이라고 다짐했다. 보리암의 기암괴석과 금산산장의 라면과 파전을 위해 가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반드시 이 곳도 추천하고 싶다. 가는 길 요소요소마다 차를 자주 멈췄을만큼 뺴어난 곳이다.


바다를 품은 마을


결과가 아닌 과정 전체를 오롯히 즐길 수 있는 여행이 많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여행을 가는 이유 중에 하나는 과정 아닌 결과로만 보여내라는 냉정한 사회로부터 잠시 멀어지고 싶다는 바램도 있지 않았나. '일상 탈출하고 가는 여행인데 반드시 근사해야만 해.' 라는 마음이 여행에서 또 다른 부담감으로 우리에게 달라붙을 때가 있다. 그러면 여행과 일상이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물론 기왕 가는 여행에 좀 더 많은 신경과 노력을 해야하는 사람이 있다면 난 그 의견도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에 몸을 맡기고 싶다면 남해에서 이런 여행도 있다고. '모먼트' 자체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 줄 곳이라고 믿는다. 


특별한 명소에서 보는 뷰가 아니구, 그냥 길가다 차를 세웠는데 보인 풍경이다.


남해에서 또 하루가 끝났다

그렇게 순간순간에 감동을 느끼다 하루가 저물고 두둑하게 먹을거리들을 사서 민박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푸르댕댕한 하늘 위에 타오르는 듯한 빛깔의 노을이 뒤섞인 광경 앞에 또 한번 차를 세웠다. 무어라 한 문장으로는 정의하기 어려운 감탄과 함께 자동으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오래오래 그 풍경을 만끽했다. 남해에서 하루를 통으로 보내며 저물어가는 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멋진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도 모르게 비는 그치고, 하늘은 개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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