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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성호 Cha sungho Aug 27. 2023

가을편지, 너와 결별하기로 했다

1970년대에  가수 김민기가 곡을 쓰고 처음 불렀던 ‘가을 편지’라는 아름다운 대중가요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가을편지’가 가수 이동원이 부른 걸 기억한다. 하지만 양희은의 ‘아침이슬’이란 곡을 쓴 김민기가 원곡자이며 처음 노래를 불렀는데 개인적으로 김민기의 가을편지가 더 감성을 후벼 파는 느낌이 있다.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나지막한 저음으로 음유시인처럼 읊조리는 그 가을편지는 이십 대 청춘시절 내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늦은 가을밤 이불속에서 조그맣게 켜놓고 듣던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이종환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서 들려오던 그 ‘가을편지’는 연애도 못해 본 나를 괜히 센티멘털하게 했었다.

이 서정적인 곡은 멜로디도 아름답지만 그 가사가 너무 괜찮았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이 아름다운 노랫말이 동시대를 살아온 수많은 한국인들의 가슴에 얼마나 많은 울림을 주었겠는가? 그런데 나는 2018년을 계기로 이 노래와 결별하기로 했다. 애써 외면하기로 했다.

곡을 쓴 김민기 씨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어찌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가을편지’의 노랫말을 쓴 사람이 ‘고 은(高 銀)’시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2018년 최영미 시인의 '괴물'이란 詩를 통한 성추행 폭로로 민낯이 드러난 인물이다. 그 해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이다. 최 시인은 그를 완전 상습범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 뉴스를 듣는 순간, 나는 바로 그가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가을편지의 작자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묘한 배신감이 들었다. 그가 지킬 박사가 아니고 하이드였단 말인가?

고 은 그는 이 폭로에 오히려 최영미 시인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국 패소하였다. 고 은의 성 추문 의혹은 이번 미투 운동 이전에 그가 승려 생활을 하다 환속한 뒤 문단에 등단한 직후부터 그러니까 60~70년대에도 여러 차례 문단에서 회자되었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제 버릇 남 주지 못하는 법이다. 더욱 괘씸한 것은 금년 초에 2018년 사건 이후 5년여 칩거하다가 실천문학사를 통해 시집을 내면서 문단에 복귀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2018년 사건에 대해 일말의 해명이나 사과도 없이.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과나 해명을 거부했다. 이런 철면피가 있을까? 그의 나이 이제 구십이다.

인생을 이렇게 추하게 마무리하다니 과연 사람은 변하지 않는가 보다.

십여 년 전만 해도 매년 연말이 가까워오면 언론에서는 고 은 시인의 노벨문학상 수상 여부를 거론했었다. 큰일 날 뻔했다. 온 세계의 비난과 조롱을 어찌 감당할 셈인가? 나라 망신도 유분수지, 이제 더 이상 거론치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우리 문단은 어떠했는가? 미투 운동을 통하여 비단 문단뿐만 아니라 문화계, 연예계, 체육계 할 것 없이 우리 사회는 이런 지저분한 성 추문 악습이 만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학이라는 고고함 뒤에 감추어진 더러운 치부가 하나씩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우리 문학의 이중성에 마치 떫은 풋 감을 씹은 기분이 들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문학을 업으로 하든지 아니든지 간에 일단 문인이라 함은 성직자에 준할(?) 도덕적인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 생각한다. 문인은 작품을 발표하면 그 글이 고치거나 회수할 수 없는 곧 자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던 걸까, 아니면 기대치가 너무 높았던 것일까.



우리의 문단도 사회의 여느 집단과도 다를 바 없는 비 청정구역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 문단도 과거 서열 문화의 폐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등단 서열을 따지고 선후배 연배를 따지고 퇴폐적인 음주문화 속에 갇혀서 여성 문인들에게 모욕감을 안겨주었다.  한심한 것은 이런 작태에 꿀 먹은 벙어리 모양 침묵하고 면죄부를 주려는 일부 문인들의 그릇된 자세다. 이런 걸 두고 전문용어로 '공동정범'이라 하던가? 결국은 용기를 내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사람은 뻔히 보고도 입을 다물었던 비겁한 구경꾼들이 아니라 최 시인 당사자였다. 그런 삶의 연결고리 속에서 문학을 한다고? 그만한 용기도 없이 문학을 한다고? 그건 문학에 대한 모독이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함이 우선이다. 그렇다고 성인군자만이 문학을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가면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실망한 것은 어찌 자신이 쓴 글과 괴리되는 삶을 살면서 글을 통해 인생을 논하고 영혼을 노래하고 인간성을 탐구한단 말인가? 양두구육 아닌가?

어떤 문인은 이러저러한 자신의 악취 나는 삶도 결국은 글 쓰는 감성의 칼을 벼리는 숫돌과도 같은 것이라고 궤변을 늘어놓기도 한다.  이건 글깨나 쓴다고 언어의 유희를 하는 것이다.

차라리 자신의 도덕성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그 수준에 맞는 글로 자신을 나타내는 게 오히려 솔직하지 않겠는가? 평가는 독자의 몫이니까.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삶으로 독자를 기만하는 것은 정말 문인이라 부르기도 아깝다는 생각이다. 물론 개인적 삶은 어떻게 살든 자유다. 기행(奇行)적인 작자가 어디 한둘인가. 하지만 혼자서 그렇게 살라. 펜을 들고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한 마리 미꾸라지처럼 사회를 휘젓고 다니며 물을 흐리지 말라.

더러운 얼굴에 분칠 한 모습으로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이런 가식적인 글에 속은 독자들은 얼마나 분할까.

가을편지 이 한 편의 노랫말이 뒤늦게 날 이렇게 분노케 할지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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