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병 장교였던 아버지의 5남매 중 막내로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 물론 군인 관사에서. 8살까지 거기서 살다가 부산 해운대로 이사하였고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 성장기 시절을 거기서 살았기에 나는 스스로 내 고향을 부산 해운대라고 지금까지 밝힌다.
하지만, 그 해운대가 어린 나에게 가장 배고픈 시절이었기에 지금도 내 기억의 언저리에 쓴맛으로 남아있다. 아버지의 실직과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온 가족이 고생했다. 우리 형제 모두가 초중고를 다닐 나이에 이런 상황으로 모두 힘들었다. 형 누나들의 학교등록금 밀리는 건 일상이었고 초등학교 다니던 나도 육성회비 150원을 내지 못해 집에 쫓겨 가기도 했다. 끼니도 굶어봤다. 해운대에서 이사를 다녔던 횟수를 세어보니 열한 번쯤 되었다.
그래도 그 어려운 시절에 훗날 나의 화양연화를 꽃피울 토대가 움텄으니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 도서관이나 친구들로부터 빌린 책으로 꾸준한 독서와 아버지가 보시던 신문 읽기였다. 그 어린 시절 계몽사 100권 전집, 한자 섞인 석간신문을 뜻을 유추해 가며 참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것들이 내 기억 저장소에 차곡차곡 쌓여서 지금까지 내 삶의 자양분이 되었다. 어릴 적 독서의 중요성을 실감한 것이다.
마산에서의 고교시절 3년을 보내고 김해에서 20대부터 결혼과 자녀 둘을 낳기까지 14년을 살다가 마침내 우리 가족은 이곳 산청으로 오게 된다.
아무 연고 없던 산청에 지도보고 콕 집어서 우리 가족은 1995년 3월에 이사를 왔다. 내 나이 서른넷에 산청에 와서 땅을 사고 아담한 집도 지어 자리를 잡았다. 지방공무원이었던 나는 어릴 적부터 집 없이 전전하던 게 싫어서 하루빨리 내 집을 짓고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이북 함경도 출신인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내 집이 없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고향’이라는 걸 선물하고 싶었다.
더 이상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 않고 어릴 적부터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를 함께 다닌 고향 친구들이 있는 우리 아이들이 되기를 바랐다. 드디어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을 때, 내가 꿈꾸던 미래를 차근차근 현실로 만들어 가는 삶의 기쁨을 얻게 되었다. 내 나이 삼십 대부터 지금 육십 대가 되어버린 지금까지 이곳 산청에서의 삶은 내 인생의 화양연화가 되었다. 아이들은 무난하게 잘 성장해서 제 몫을 잘 감당하고 있고 아내는 여전히 매력적인 동반자이다. 내가 고생이 되더라도 땀 흘려 수고해서 사랑하는 내 가족을 부양하고 부모님께 자식으로서의 도리도 소홀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특히나 정서적으로 아내와 아이들에게 좋은 남편, 아빠가 되려고 나름 노력했다. 그건 아직도 계속되어야 할 부분이지만.
내 삶에 주어진 숭고한 소명을 그런대로 잘 감당해 왔다는 스스로의 평가에 만족하기에 내 인생 절반을 살아온 산청에서의 삶 그 인내와 성실의 여정 자체가 내 인생의 화양연화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절정의 꽃도 그걸 피기 위해 얼마나 모진 비바람과 땡볕을 견디어 내었겠는가. 참아내고 뚜벅뚜벅 걸어왔던 그 삶 자체가 정말 아름다운 화양연화 아닌가. SG워너비의 보컬 김진호가 부른 가족사진이라는 노래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그을린 그 시간들을~’
그래, 지금 활짝 핀 꽃보다도 거름이 되어버렸던 그을린 그 시간들이 너무도 소중하다. 그 시간들에 내 인생의 화양연화를 선물하고 싶다.
지금은 그 아름다운 인생의 절정을 누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