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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성호 Cha sungho Jul 22. 2023

 내 인생의 화양연화

              

                                                                             

나는 해병 장교였던 아버지의 5남매 중 막내로 경남 진해에서 태어났다물론 군인 관사에서. 8살까지 거기서 살다가 부산 해운대로 이사하였고 초등학교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성장기 시절을 거기서 살았기에 나는 스스로 내 고향을 부산 해운대라고 지금까지 밝힌다.

하지만그 해운대가 어린 나에게 가장 배고픈 시절이었기에 지금도 내 기억의 언저리에 쓴맛으로 남아있다아버지의 실직과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온 가족이 고생했다우리 형제 모두가 초중고를 다닐 나이에 이런 상황으로 모두 힘들었다형 누나들의 학교등록금 밀리는 건 일상이었고 초등학교 다니던 나도 육성회비 150원을 내지 못해 집에 쫓겨 가기도 했다.  끼니도 굶어봤다.  해운대에서 이사를 다녔던 횟수를 세어보니 열한 번쯤 되었다

그래도 그 어려운 시절에 훗날 나의 화양연화를 꽃피울 토대가 움텄으니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 도서관이나 친구들로부터 빌린 책으로 꾸준한 독서와 아버지가 보시던 신문 읽기였다그 어린 시절 계몽사 100권 전집한자 섞인 석간신문을 뜻을 유추해 가며 참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그것들이 내 기억 저장소에 차곡차곡 쌓여서 지금까지 내 삶의 자양분이 되었다어릴 적 독서의 중요성을 실감한 것이다.

 

마산에서의 고교시절 3년을 보내고 김해에서 20대부터 결혼과 자녀 둘을 낳기까지 14년을 살다가 마침내 우리 가족은 이곳 산청으로 오게 된다

아무 연고 없던 산청에 지도보고 콕 집어서 우리 가족은 1995년 3월에 이사를 왔다내 나이 서른넷에 산청에 와서 땅을 사고 아담한 집도 지어 자리를 잡았다지방공무원이었던 나는 어릴 적부터 집 없이 전전하던 게 싫어서 하루빨리 내 집을 짓고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이북 함경도 출신인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내 집이 없었다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고향이라는 걸 선물하고 싶었다

 

더 이상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 않고 어릴 적부터 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를 함께 다닌 고향 친구들이 있는 우리 아이들이 되기를 바랐다.  드디어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을 때내가 꿈꾸던 미래를 차근차근 현실로 만들어 가는 삶의 기쁨을 얻게 되었다내 나이 삼십 대부터 지금 육십 대가 되어버린 지금까지 이곳 산청에서의 삶은 내 인생의 화양연화가 되었다아이들은 무난하게 잘 성장해서 제 몫을 잘 감당하고 있고 아내는 여전히 매력적인 동반자이다내가 고생이 되더라도 땀 흘려 수고해서 사랑하는 내 가족을 부양하고 부모님께 자식으로서의 도리도 소홀하지 않으려고 애썼다특히나 정서적으로 아내와 아이들에게 좋은 남편아빠가 되려고 나름 노력했다그건 아직도 계속되어야 할 부분이지만.

내 삶에 주어진 숭고한 소명을 그런대로 잘 감당해 왔다는 스스로의 평가에 만족하기에 내 인생 절반을 살아온 산청에서의 삶 그 인내와 성실의 여정 자체가 내 인생의 화양연화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절정의 꽃도 그걸 피기 위해 얼마나 모진 비바람과 땡볕을 견디어 내었겠는가참아내고 뚜벅뚜벅 걸어왔던 그 삶 자체가 정말 아름다운 화양연화 아닌가. SG워너비의 보컬 김진호가 부른 가족사진이라는 노래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그을린 그 시간들을~’

그래지금 활짝 핀 꽃보다도 거름이 되어버렸던 그을린 그 시간들이 너무도 소중하다그 시간들에 내 인생의 화양연화를 선물하고 싶다

지금은 그 아름다운 인생의 절정을 누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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