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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성호 Cha sungho Jul 22. 2023

한 나

                              

 그때가 정확히 1986년 여름이었지나는 스물다섯 새파란 나이의 우체국 집배원이었다

이제 2년 차 신출내기였지만 한참 팔팔한 나이라 이전 근무지보다 우편물량이 엄청 늘었어도 그럭저럭 헤쳐 나갔다이전 근무지에선 지역이 광범위하다 보니 오토바이로 일했다

그러나 얼마 전 근무지를 옮긴 후에는 지역은 좁지만 우편물량은 갑절로 많은데도 집배 수단으로 자전거가 지급되었다자전거 앞부분 핸들아래에 커다란 우편 가방이 달린 자전거였다.

어릴 적 흔히 보던 우체부 아저씨가 타고 다니던 바로 그 자전거였다

 

그날은 아침부터 온종일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섰지만 온 가족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여름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열두 살 위 큰 형님이 아들을 낳고 두 번째 얻은 딸 한나가 급성폐렴으로 어제 병원에 급히 입원했다이제 겨우 백일이 지났는데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이었다처음에는 가벼운 감기려니 하며 대수롭잖게 여기다가 점차 징후가 나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 오는 날은 우편집배원에게 정말 힘든 날이다비옷이야 입지만 자전거를 타고 배달해야 하니 우산을 쓸 수가 없고 우편물이 비에 젖을 새라 조심해야 하니 평소에 비해 이중고였다

손 편지의 잉크가 빗물에 번지면 정말 큰일이 난다주소가 지워지면 배달 불능이다

그날, 무슨 정신으로 우편배달을 했는지 조카 한나의 병세가 걱정되어 노심초사하였다

서둘러서 일을 빨리 끝내고 우체국으로 들어가는 길에 궁금해서 집에 들렀다

비를 흠뻑 맞은 비옷 차림으로 나는 후다닥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다

마침 작은 누님이 집에 있었다. “한나는 어떻대요?”

누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였다. “한 시간쯤 전에 전화 왔는데 하늘나라 갔단다.”

나는 그 얘길 듣는 순간현관 벽에 기대어 선 채 울음을 터트렸다한참을 울었다.

지금도 그때 울부짖던 내 얼굴에서 빗물과 함께 흘러내리던 눈물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큰 형님은 첫아들을 낳고 나서 제법 터울이 지는 예쁜 딸을 얻고서 많이 기뻐했다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이랑 그 아래에서 난 친 손주외 손주까지 모두 손수 작명을 하셨다어릴 적 한학을 배우신 아버지는 그렇게 식솔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걸 당연하게 여기셨다그런데 이번 큰 형님의 딸이 태어났을 때는 어쩐 일인지 작명을 두고 온 식구들에게 의견을 물으셨다.

우리 집에도 드디어 민주화의 물결이... 그 분위기 속에서 막내인 내가 추천한 한나가 채택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랑스러웠던 조카 한나가 채 피기도 전에 짧은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그 일이 있은 후 큰 형님은 소주잔을 기울이는 날이 잦아졌다이런 슬픔은 온 가족들의 가슴에 두고두고 오래도록 남아 있는 법이다

오늘도 공교롭게 여름장마가 시작되었다이제는 얼굴도 잊혀진 한나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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