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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실수로 약을 먹었어요.

[엄마 아빠를 위한 응급실 이야기] 05화

소아 약물 중독이라... 약물 중독하면 보통 자살을 위해 복용한 농약 중독이나 실수로 노출된 공업용 물질 중독을 떠올리기 마련일 텐데요. 소아의 중독은 어떤 경우일까요?


저는 어렸을 때 응급실에서 위세척을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다. 바로 소아 약물 중독이 의심되어서 말이죠. 그것도 무섭다는 수은 중독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선물 받은 필통에 붙어있던 온도계가 신기해 그 안의 물질을 관찰하려 했나 봅니다. 온도계를 깨서 수은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빨간 액체에 혀를 대고 맛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왁스 냄새가 나는 맛이었는데 말이죠.


당시 동생에게도 맛 보여 준 덕에 두 형제는 응급실에 실려와 위세척을 받게 됩니다. 레빈 튜브라는 콧줄 아시나요? 두꺼운 콧줄을 넣을 때 묻히는 차가웠던 젤리, 목구멍을 넘어갈 때 느껴지는 심한 구역감과 이물감, 그 느낌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러고 나서 위 안쪽을 식염수로 깨끗하게 씻어냈었죠. 다행히 어린이용 문구에 수은을 썼을 리 없고 썼더라도 위장관으로는 흡수되지 않는다는 주치의 선생님의 판단 아래 무사히 퇴원했었습니다. 호기심 충만한 어린 시절, 초등학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야기입니다.





앞의 이야기를 왜 꺼내었냐고요? 오늘 저희 응급실에 소아 약물 중독으로 온 환자가 있었습니다. 어떤 약을 왜 먹었을까요? 1주일 전, 감기약을 처방받은 아이는 처음 하루는 약을 잘 먹었습니다. 하지만 놀기 바쁘고 학원가기도 바쁜 아이에게 규칙적인 약 복용은 쉬운 일이 아니죠. 결국 약을 다 남겨버렸습니다. 오늘은 병원에 가야 하는 날이고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제 좀 눈치를 채셨나요? 조금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이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밀린 방학숙제를 안 하면 개학 전날 당일치기라도 해서 숙제를 끝내야죠. 약도 안 먹은 게 있으면 당일치기를 해야 하는 게 아니겠어요? 결국 6일 치, 18 봉지의 약을 병원 오기 전에 당일치기한 거죠.



아이는 힘들었겠지만 제가 예전에 받았던 처치와 같이, 두꺼운 콧줄을 넣고 위세척을 시행해야 했습니다. 지연성으로 오는 합병증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가지 혈액검사와 입원치료가 필요했음도 당연하고요. 아마 이 아이는 이번 일로 '약은 절대로 밀린 숙제 당일치기 하듯 하면 안되는구나.' 하고 깊게 깨달았을 것 같습니다.





감기약은 보통 심각한 부작용이나 합병증은 드문 약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항히스타민제에 의한 졸림 정도라고 할까요? 하지만 주의해야 할 성분이 하나 있습니다. 간독성을 가진 아세트아미노펜(상품명 타이레놀, 그 외 펜잘, 게보린, 판피린 등에 포함됨)입니다.



우리가 해열제와 진통제로 가장 흔히 사용하는 약물 중 하나인 아세트아미노펜은 간으로 대사 되는 물질입니다. 과용량을 사용하게 되면 간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칠 수 있죠. 보통 체중당 120~150mg 이상에서 간독성을 일으킨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만 1세 10kg 정도 소아에게는 성인용 650mg 타이레놀 2정 또는 소아용 325mg 타이레놀 4정이 한계가 되겠네요. 30kg 정도의 소아는 그 세 배가 기준이 되겠고요.



이 이상을 복용하게 되면 간수치가 오르면서 구역, 구토 또는 황달이 끼는 증상의 독성 간염에 빠질 수 있습니다. 첫날은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수 있으니 아세트아미노펜 중독이 의심되면 입원해서 즉시, 그리고 4시간 또는 8시간 뒤, 이렇게 몇 차례 간수치를 확인하고 평가해야 합니다. 보통은 2주가량 지나 회복되게 되는데 간혹 간부전에 빠져서 생명에 위협을 겪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이들 곁에 약 함부로 두지 말란 말이 왜 나왔는지 아시겠죠?


만약 내 아이가 약을 잘못 복용했다, 어떻게 조치해야 할까요? 성인, 노인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제일 먼저 의식과 호흡이 정상인지 확인합니다. 이상이 있으면 119 상황실을 통해 응급처치를 시행함과 동시에 적절한 병원으로의 이송이 필요하겠죠? 의식과 호흡이 이상 없다 하더라도 다량의 약물 중독인 경우에는 한 시간 이내의 빠른 위세척이 도움이 되므로 119 구급대원의 도움을 받는 게 낫습니다. 이때, 어떤 약을 얼마나 복용했는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보호자께서 약 처방전이나 버려진 약봉지를 챙겨주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번은 약물이 아닌 벌레퇴치를 위한 훈증기용 매트를 입에 문 상태가 발견되어 온 만 1세 전후의 소아를 진료한 적이 있습니다. 성분을 찾아보니 살충제가 들어있다고 쓰여있어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조사에 문의한 결과 다행히 매트를 물고 빤 정도로는 인체에 흡수될 수 있는 양이 극미량이라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는 답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또한 자주 생기는 중독 문의 중 하나가 흡습제로 쓰이는 실리카겔입니다. 김 먹다 보면 실수로 알갱이 몇 개를 함께 먹는 일도 생기죠? 호기심에 먹는 경우도 있고요. 실리카겔도 일부 먹은 정도로는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겠습니다.


그 외에도 가정에서 사용하는 풀, 딱풀, 잉크, 볼펜 잉크, 화장품, 립스틱, 샴푸, 섬유유연제 등을 입에 문 아기를 발견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 물질들은 실수로 약간량 먹었다 하더라도 인체에 유의한 해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외에 잘 모르는 중독 문의에 대해서는 119 상황실이나 응급실 의료진의 도움을 받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이들 키울 때 중요한 것, 누가 뭐래도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이겠죠? 소아 중독 사고 예방은 부모의 철저한 환경관리가 우선인 만큼 주의에 또 주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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